중학교 반장 선거는 햄버거나 피자를 먹는 날이었다. 새로 뽑힌 반장과 부반장의 엄마들은 뽑아준 반 친구들에게 사제 음식을 돌렸다. 선거는 인기 투표에 가까웠지만 반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태도로 선거 운동에 임했고, 반 학생들은 마음에 드는 후보자 친구의 이름을 종이 투표지에 적어서 냈다. 장난으로 이름을 이상하게 쓰면 무효표로 분류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반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그때 내건 나의 구호는 ‘여러분의 밥이 되겠습니다’였다. 그 결과 나는 부반장이 되었고 우리 엄마는 우리 반 애들에게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를 돌리셨다. 반장 선거는 우리들의 행사였다.
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 후 미국 공립 고등학교에서 1년 공부하고 같은 학교로 복학했다. 그래서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한 학년 밑 동생들이랑 보냈다. 미국 가기 전 딱 한 학기를 함께 했지만 이미 내 동갑 친구들이 윗 학년에 있었고, 같은 학년 동생들도 형 형 하고 잘 따라주었다. 2학년이 되면 전교 학생 회장 선거를 했다. 고3은 입시에 올인해야 하기 때문에 2학년이 학생회를 이끌었다. 나는 학생 회장으로 출마하는 친구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다. 내 독특한 상황 덕에 가진 학교 내 인지도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구상이었다. 내가 서포트하는 후보자가 당선되면 나는 학생 부회장이 된다.
후보자 등록을 마친 후 어느 날, 교무부장이 수업 중인 나를 불러냈다. 나한테 러닝메이트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너는 내신 성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둥(나는 영어특기전형으로 수시에 올인했다), 그리 얌전한 아이가 아니라는 둥, 내 러닝메이트 자리를 다른 애한테 넘기라고 했다. 난 그 애가 누군지 알았다. 내신 상위반에 있던 조용한 친구였다. 나는 그러기 싫다고 했다. 내가 나가고 싶다고 했다. 몇 차례 더 나를 압박했지만 무시하고 회장 후보자와 교실을 돌며 선거 캠페인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해 전교 학생 회장과 부회장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교무부장은 우리 엄마한테도 전화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우리 엄마는 애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이것이 어른들이 학생의 절차에 개입하고 조종하려 했던 내 첫 기억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누군가의 학생기록부에 한 줄 채워 넣으려고, 어른들은 학생들의 행사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어른이니까 아이들의 일을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오만함, 그것을 곱씹을수록 공정함을 부르짖는 우리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귀한지 깨닫는다. 그날 교무부장이 망가뜨리려 한 것은 학생 부회장 자리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의 행사라고 믿던 절차의 공정성이었다.
공정함이란 과정 속에 사사로움이 없다는 의미다. 공정하다는 것은 정해진 규칙과 과정을 최선을 다해 지킨다는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귀한 가치다. 다만 그것은 공정함과는 다른 축에 놓여 있다. 공정함은 누구를 더 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를 같은 규칙 아래 세우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정함의 불변 가치는 모든 참여자가 과정을 신뢰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공정함이 곧 권위다. 이 권위는 패배자로 하여금 승복하게 만들며, 승리자에게는 당위성과 책임을 함께 부여한다. 권위는 옳은 결과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과정에서 나오며, 좋은 규칙은 모두를 보호한다.
사회심리학자 톰 타일러의 연구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조차 받아들이는데, 그 조건이 결과의 유불리가 아니라 절차의 질이라는 점이다. 승복 결정에 네 가지가 작동한다고 하는데, 먼저 내 의견이 접수되는가(voice), 심판이 중립적인가(neutrality), 과정이 선의로 만들어졌다고 믿는가(trust), 나를 존중했는가(respect)이다. 이게 충족되면 사람은 게임에서 져도 패배를 인정한다. 존 롤스의 ‘순수 절차적 정의’에 따르면, 공평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합의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공정한 절차에 합의하고 그 결과에 승복한다고 했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독립적인 결과 기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절차만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함과 공평함은 다르다. 모두에게 똑같은 규칙으로 똑같은 시험을 보게 하면 그건 공정하지만, 응시자들의 출발 조건이 다르다면 결과는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억지로 결과를 맞추려고 한다면 그 과정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공평성을 강제하려면 정당성이 희생된다. 정당성을 얻으려면 논쟁거리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일일이 납득시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절차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폭군은 나를 예외로 두고 폭력을 통해 권력을 움켜쥐지만, 권위는 본인을 남들과 같은 규칙으로 묶음으로써 자연스레 인정을 얻지 않는가.
인생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지만 불공정하지는 않다고 나는 믿는다. 이민자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가는 이유가, 나도 열심히만 하면 남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인과관계, 게임의 규칙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자보를 붙이고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내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대견함을 느낀다. 누가 옳고 그른지, 어느 편의 주장이 끝내 맞는지를 여기서 판가름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귀한 것은 그들이 ‘절차가 공정했는가’를 묻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심판이 중립적이었는지(neutrality) 따져 묻고, 자신들의 의견이 접수되기를(voice) 요구하는 일을 우리 사회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결과에 승복하기 위해서 과정을 의심할 줄 아는 성숙한 국민의 모습이다. 자기 존중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사회 속에서 커 가는 아이들에게 공정함을 솔선수범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서울에 아파트가 있는 재력이 권위가 아니라 공정함이 진정한 권위라는 것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다음 세대가 한 차원 높은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게 만들 방법 중 하나는 공정함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래야 가뜩이나 불평등한 세상에서 정의가 살아 있음을 믿고, 무기력해지거나 분노를 쌓지 않을 것이다. 잘 만든 절차는 개개인의 내적 행위 기준이다. 이것이 우리의 유산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