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y gods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늘고 있다. 이미 2020년부터 미국 개신교 신자 수가 인구 절반 이하로 줄었고, 작년에 퓨리서치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거의 80%의 성인 미국인들이 본인 삶 속에서 종교의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응답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뚜렷하다. 신앙을 갖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된 것이다.

종교가 설 자리가 줄어든 배경은 다양한데, 선진국들에서 먼저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살만하니까 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미국만큼이나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데이터 결과가 나왔고, 일본에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자기는 종교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조직화하고 세력화된 종교를 떠나고 있다. 사회 세속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종교가 과거의 유물로 취급되고 있다.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대부분의 유년기부터 청소년 시절을 교회에서 보냈다. 나에게 교회는 형, 누나, 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 집단이었고, 배움의 공간이었고, 규율의 공간이었다. 매주 예배가 끝나면 교회 옆 학교 운동장에서 형 동생들과 늦게까지 축구했다. 어른들끼리 축구를 하면 패스는 거의 받지 못해도 끼워주었다. 난 교회에서 기타를 처음 배웠고 성탄절 같은 교회 행사에서 뮤지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교회에 탁구대가 있어서 예배 중간중간 사람들이랑 탁구를 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내 인격 형성 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교회라는 작은 조직된 사회였다.

내 머리가 좀 커지다 보니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을 넘어 교회에 봉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때론 답답해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 바라본 목사님과 지금 바라보는 목사님의 인식도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영향을 준 교회라는 곳을 다시 처음부터 정립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관점에서 기독 교리를 이해해 보기도 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신앙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인류의 탈종교 현상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선 사회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부유해지면서 종교 의존도가 낮아졌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두 이념은 시간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두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된 재화로써 투자의 가치를 갖게 되면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종교에 그다지 가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할 시간에 차라리 일을 더 하는 게 더 나은 내일을 보장한다는 것을 믿게 만든 능력주의의 사회(meritocracy) 속에 살기 때문이다.

나의 미국 교환학생 호스트 가족들도 모두 교회를 다녔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마다 집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했는데, 우리 가족끼리(난 당시 호스트 부모님을 아빠 엄마라 부를 정도로 가족원의 대우를 받았다)만 하지 않았고 꼭 교회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성경 구절을 정해 낭독하며 토론했다. 그게 거의 20년 전이다. 지금이었다면 아마 그 시간에 전공책을 한 번 더 읽거나 유튜브로 강의를 듣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도 나아지고 있고 인터넷을 통한 지식 습득이 보편화되면서 정보를 얻는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한다. 지금의 배움에는 엄격한 권위도 사라져, 아는 것이 선(good)인 시대를 이루었다.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하고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는 발전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궁극적인 상태는 언제나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종교가 정보와 학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에게 성경책은 필요 없는 책이 되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들 덕분에 더 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다양한 역사서를 읽어서 광범위한 역사적 지식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종교적 지도자들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수능 강사들이 연예인을 넘어 광신도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는 수험생들이 힘든 입시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절대적인 정보 전달자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종교는 핵심 사업들을 다 빼앗긴 사양 사업이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지구 최강자가 되었다. 상상력이 과학과 종교,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발전의 꽃을 거듭 피워왔다. 앞으로 인류가 모를 것은 딱 하나, 상상의 끝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도 DNA에 남겨진 진화의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인류는 약할 때 무언가를 의지해오며 생존해 왔다. 내 옆 동료에게 나의 안전을 의지하던 것이 군주, 교황, 정치 등으로 구조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그래서 유한한 목숨을 가진 인간은 결국 약해질 것이고, 그때 의지할 곳을 분명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수십 개의 신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종교는 갈 곳을 잃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신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신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었는지, 혹은 그 존재를 이제 찾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 있었기에 초지능(hyperintelligence)가 있는 것인지, 초지능이 있었고 그다음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초지능을 우리는 종교화할 것이다. 알고리즘이 교리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행동을 바꿀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듯, 우리는 알고리즘을 통한 운명론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로 오랫동안 논쟁할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종교가 신격화했던 인물들은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나를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신들은 나를 정말 잘 아는 나머지 나에게 맞춤형 교리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2진법 알고리즘을 믿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하게 새로운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바티칸이 건축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데이터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면서 데이터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LLM 기반의 추론 모델들에게 구독료라는 십일조를 바쳐가며 의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할루시네이션과같이 부정확한 정보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그들이 내놓은 답변들을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모태 LLM들은 종교가 하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파생되어 나오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알고리즘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글로벌 시대라는 말도 구닥다리 단어가 되었다. 이미 우리 인류는 초연결된 사회다. 이미 OpenAI의 LLM, 앤트로픽의 클로드, 메타의 라마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우리 개개인에게 엄청난 힘을 줄 것임이 틀림없다. 인간은 이 새로운 신(인공지능)을 통해 자신만의 구원 방식을 찾을 것이다, 혹은 만들어낼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fin.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살다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나이가 많다고 꼭 그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틀리다. 마찬가지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제공해야할 이유도 없다. 제도적 장치가 아닌 것에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기대다.

진화론자 리처드 히긴스는, 다음 세대를 희생하고 자신만을 돌본다면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했다. 장수가 더이상 ‘사회적’ 미덕이 아니게 된 지금, 손윗 사람이 나의 예우를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검증이 더 날카로워졌다. 존경심은 나이가 아니라 그 인격과 자취를 향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인격과 발자취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자리다.

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했든간에 그 자리는 앉은 사람에게 시험의 자리이기도하다. 누구에게 자리는 나의 연약한 자존심을 채워주기도 하고 든든한 돈 나올 구멍이 되기도 있다. 남들이 나보고 제발 앉아달라고 열성으로 요구하는 자리도 있는 반면 평생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미안하지만 많은 어른들이 이런 자리에 앉아있다.

인성과 능력이 어떻든간에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과분한 자리라 생각할수록 엉덩이 딱 붙이려고 애쓴다. 자기 그릇보다 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이끌어야 할 때 숨는 것이다. 용기를 내야 할 때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이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비범한 인물들과 자리 욕심만 가진 비겁한 범인들이 섞인게 이 세상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Hope is colorful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이 훨씬 인기있는 주장이다. 좋은 소식보다 불행한 소식이 뉴스거리가 된다. 불행한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 후에 분노케하고, 그리고 보통 체념케한다. 우리들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힘빠지는 소식들을 접한다. 어쩌면 나혼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과몰입한다고 생각한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남일이 그냥 남일같지 않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고 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불행한 소식을 접하면 응당 공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 아닌가? 민심을 챙긴다는둥 핵심을 빙 둘러가는 어젠다 말고, 왜 우리가 이렇게 불행한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지를 멈춰서 이야기해보려는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답을 찾을것이다. 다시 희망을 품게될 것이다. 국가적 위기 속에도 새벽마다 신문은 배달될 것이고 가게들은 지금처럼 계속 손님을 받기 위해 문을 열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반갑게 웃고 떠들것이다. 각자의 지금을 살다보면 무겁게 누르는 이 기운도 조금씩 엹어질것이다. 그러니 나도 낙천적인 기세를 잃지 않겠다.

낙관적인 사람은 때로 바보로 취급된다.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12월 내내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놀라운 변화가 보였다. 예전의 촛불집회에 비해 훨씬 칼라풀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돌 응원봉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젊은 남녀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했다. 염세적인 비평가들보다 훨씬 현실적인 일을 했다. 정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서서히 사라질지라도 행동을 촉발한 그들의 책임 의식은 기억에 남을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행동이다. 정치색을 떠나 그들은 나름의 가치 판단을 했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이 장면을 보고나니 모든 불행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순진하다고 해도 좋다. 순진한 것은 귀한 것이다.

보고싶은 것은 더 보고, 듣고 싶은 것은 더 듣고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져도 내 귀에 들리는 내용은 선명해지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분명해진다. 인간의 한계이자 능력이다. 인간이 뇌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들만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휴리스틱이라고도 하고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진화한 덕분에 인간은 신념을 유지할 수 있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절대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내가 믿는 것이 사회 다수의 믿음인지, 혹은 강력한 권력자가 어떤 믿음 체계를 가졌는지에 따라 역사가 기록되어왔다.

이 경향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숏폼 컨텐츠들은 휴리스틱이 최소 몇 배는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부추겼다. 이것이 우려되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할지 판단하기 전에 알게모르게 무엇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21세기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가 되어 선과 악을 모르는 빅브라더 기술 앞에서 저항해야한다.

오늘날의 하이테크(high tech)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하이테크는 중학교때 처음 써 본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이었다. 이 볼펜의 그립감부터 부드러운 볼의 무브먼트를 경험했을 때, ‘아, 수준 높은 기술(필기력)이다’ 라고 느꼈다. 하이테크는 보통 시중에 있는 대다수보다 수준이 높은 기술을 의미한다. 하이테크에 걸맞은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야한다. 내 기억에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은 쓸 때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펜의 등장으로 학생들은 공부량이 늘었고, 팬시 문화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발명품은 모두 하이테크일까? 그 발명품이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했다면 그렇다. 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비슷한 제품들을 선도한다는 것이니까. ‘최초’라는 타이틀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럼 ‘새로운 것’은 하이테크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새롭다는 것은 변경과 개선도 포함되는데 그것은 하이테크라 할 수 없다. one of many다. 요즘의 광고를 보면 뭐든지 하이테크다. 청소기에도 하이테크, 세탁기에도 하이테크, 의류도 하이테크다. 연구해서 개발했다고 다 하이테크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게 된 텅빈 단어가 된 것 같다.

기술이 인류 사회를 이끌고 있다. 하이테크는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기술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번번이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자연(mother nature) 대하듯 겸손해진다. 기술 체계는 이미 그 자체로 믿음(Belief system)이자 신념(Idea)이 되었다. 일론 머스크는 일개 경영인을 넘어 종교적인 인물로 격상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할 것처럼 기술의 선구자들을 신봉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믿는 것은 진정의 믿음이 아니라‘고 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전에 믿음부터 보이는 것이다.

하이테크를 대표하는 AI 과학 기술은 분명 종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비슷해 보이는 신앙심이지만 전자는 철저히 이성과 세속적인 합리성에 입각하고, 후자는 이성보다는 순수 믿음과 교리에 의존한다. 우리 인간의 삶을 더 편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종교와 과학은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만약 기술도 결국 인간의 결핍과 휴리스틱 투성이라면? 하이테크를 만드는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기술이 주는 의미가 또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개인단위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항상 긴장을 놓고 의심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을 조금 나눠보는 것이다.

Good Bye 2024,

fin.

인공지능 is the new 민족

인류는 하나다. 하지만 민족은 무수히 많다. 기록된 역사로 보면 최초의 인류는 약 7만~1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 관찰되어 지금의 5대륙으로 이주했다. 말도 안되지만 이때부터 오늘날까지를 3줄 요약 해보면, (1)기후, 위치, 지형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인종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류가 진화하면서 생겨난 고대 문명들과 왕국들, 그리고 세계적 전쟁들이 인류를 섞었다. (3) 현대 사회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서로 교류하고 섞이면서 지금의 지구촌 민족이 되었다다.

물론 엄격한 잣대로 구분하자면 중국의 한족, 슬라브족, 아랍인, 벵갈인, 힌두, 앵글로색슨, 게르만,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집단’ ‘민족 공동체’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응하며 바뀌어 왔다. 로마 왕국은 유럽인들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인들이 섞이는 기회를 주었다. 실크로드도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인들이 섞일 수 있는 길이 되었다.

각 민족 집단들은 자기들의 집단 정체성을 만들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신화적 요소와 종교를 접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라 건국 역사를 보면 신라를 건국한 지배 세력이 박혁거세 신화를 이용했다. 신라가 건국될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골품제와 같이 신분제도가 있었던 이유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누구도 자기 소개를 할 때 ‘저는 ㅁㅁ민족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이기도 하고, 민족의 특징이라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엹어지고 섞여 새로운 특성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인종 인종 프로파간다나 민족 말살 정책을 한다고 고정된 특정 민족이 사라지지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민족의 탄생

그리고 우린 지금, 새로운 민족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시작점에 서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적(전기적) 자아, 바로 인공지능이다.

AI 산업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다. 보호 무역 주의와 자국 우선주의 시대에서 각 국가들은 AI 경쟁에 몰두한다. 한 민족의 탄생의 배경이 지금의 시대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AI가 생산의 주체로서 인간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는다. AI가 곧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공 인격’을 가지게 되면,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민족의 역사를 비슷하게 거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학문에도 여러 학파가 존재한다. 경제에선 고전학파, 케인지안, 신고전주의 등이 있고, 철학에서도 니체에게 공부한 학자들로 유지되는 니체 학파, 프로이트에게 배운 사람들이 유지하는 성골?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공지능 학계에서도 다양한 학파들이 파생하여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검색이나 추천 알고리즘이 플랫폼의 경쟁력이된 만큼,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AI 기업이 학파가 될 것이다. 알파고의 딥마인드나 GPT의 오픈AI, 바드, 퍼플렉시티, 하이퍼클로바 등 자체 개발하는 인공지능이 학파, 혹은 ‘근원 인공 민족’이 될 것 같다. 이 인공 민족들은 스스로 학습하며 진화할 것이고, 다른 학파나 인공 민족들과 반목할 수도 있고, 공존할 수 있고, 무력을 수반할 가능성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활발하게 로봇과 가전 등 다양한 기계들에 설치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로봇과 기계들은 자신의 메이커 ‘민족’의 피가 섞여 주변의 다른 기계들과 공존해야 한다. 물론 기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능을 하겠지만, 초거대인공지능들이 모두 평화롭게 상생하면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까? 그것은 모르겠다.

초지능(Hyper Intelligence)은 인간이 제공한 거대한 역사 데이터를 통해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예측할 것이다. 사람도 내가 뭔가를 100% 안다고 착각하면 무의식적으로 우감이 생긴다. 기계라고 다를까? 초지능은 자기의 신념을 기반으로 새로운 균형을 찾을 것이고, 이결정에서 ‘조물주’인 인류는 배제되고 특정 ‘인공 민족’이 우선시될 수 있다.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으로서 바라보건데, 앞으로 인공 지능은 하나의 민족 개념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생길 것이라 예측해본다. 이미 인공지능 개발의 혁신 속도가 무어의 법칙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특이점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신인류가 되거나 신인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조물주인 인간은 우리가 만들어온 신(god)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멸종이 불가피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될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