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서스 <인구론>

우리 아빠는 8남매의 장남이다. 우리 엄마는 4남매의 차녀다. 어릴적엔 명절마다 내 또래의 사촌들로 항상 북적였다. 내 위아래로 사촌들만 열댓명인데, 좁은 시골 할머니집에서 밥 시간이 되면 불만 없이 상 앞에 옹기종이 낑겨 앉아 밥도 잘 먹고 어른들이 주시는 과일도 잘 먹었다. 집 밖에 나가면 온동네가 놀이터였다.

초중고시절에 살았던 아파트에도 내 또래들이 한트럭이었다. 옆집에도 동갑 친구가 살았다. 그래서 내게 북적거림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남들보더 좀 더 앞 서야 하는 것이란,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소양이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양옆에 있는 애들보다 더 잘 하는 것. 그 이유를 찾는 일은 서랍에 넣어둔채 그냥 책상 위에 놓인 정답이 있는 문제만 열심히 풀어재꼈다.

그런 우리가 최근 몇 년전부터 대한민국 소멸론을 듣고 있다. 혼기의 총각들과 아가씨들이 결혼을 안 한단다. 젊은 부부들은 어른 세대만큼 애들을 안 낳놓는단다. 이미 애완견 유모차 판매가 아기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 근데 잠깐, 내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상황에 열을 올리지? 올해 우리 부부는 첫 아들을 맞이하는데. 우리 가족 앞가림만 잘 하면 될 일 아닌가.

<인구론>을 쓴 맬서스는 영국에서 태어난 1766년생 목사다. 32세에 <인구론> 초판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어제 쓰여진 책처럼 많은 부분에서 나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느낀 멜서스는, 속은 인간에 대한 열렬한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겉으로는 끝까지 차가운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진 과잉 인구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례로, 멜서스 트랩(The Malthusian Trap)이란, 인구를 지탱하는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과잉 인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들로 다시 인구가 억제되어 다시 식량 생산 수준으로 떨어짐을 반복한다는 끊임 없는 굴레를 말한다. 딱 적절한 인구가 유지되는 골디락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문명 사회를 거쳐 근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인구는 항상 과잉과 부족 사이를 넘나들었다. 먹을 게 없어서 뭐든지 줏어먹던 시절에는 먹을게 없으니 뺏어서라도 내가 살아야했다. 그러니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야만의 시간이 있었다. 이후 토지를 사용해서 식량을 생산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인구가 너무 늘다보니 농업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고, 수요 대비 공급이 초과하니 자연스레 노동 임금이 하락한다. 이렇게 되니 다시 모두가 빈곤해지는 상황이 온다. 멜서스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태동할 때 태어났는데, 증기 기술로 방직 산업이 크게 성장할 때 신규 노동 수요가 창출되면서 열악한 환경이지만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때 얼마나 노동 수요가 높았는지는 아동 노동자들이 합법이었다는 역사가 말해준다. 하지만 다시 이때 창궐한 빈곤, 질병, 도덕의 추락 등으로 인해 인구가 준다.

멜서스는 질병, 빈곤, 전쟁과 같은 인구를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사건들이 꾸준히 역사에서 발견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 문화, 교리, 정책, 산업 변화 등의 인구를 ‘예방적으로 억제하는’ 장치들이 계속해서 ‘인구 과잉’을 막았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한 국가에서 기존 산업 체계에서 적극적인 억제 사건이나 예방적인 억제 장치가 없다면 인구 과잉은 잉여 노동력을 발생시키고, 그렇게 노동 임금이 떨어져 대다수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는 것이 뭉뚱그려서 묘사한 멜서스의 관점이다.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관찰과 통찰이 작금의 현실에서 얼마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대체 출산률을 하회하는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여기서 여타 선진국들보다 가장 먼저 인구 절벽에서 뛰어 국가 소멸이라는 낙하지점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지금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명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손가락질 하는 일은 소모적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자체로 자연적인 일이다). 이제 노인들은 훨씬 오래 사신다. 폐교되는 초등학교 수가 늘고 있다. 일반 직장을 다니려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다.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나는 지금 상황의 원초적 원인을, 1번으로 국가 차원의 산업 변화가 늦었다는 것을 꼽고, 그 뒤로 국가 차원의 인구 정책을 꼽는다. 그때 국가가 그리 많이 낳으라고 할 때 태어난 노동력이 대부분 지금 노동 가치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산업 경쟁력에 기여하는 수준을 말한다. 정책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해야할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지금 저 지랄을 하며 쓰는 언어의 수준을 보니 지금 우리나라 꼬라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부자 삼 대 못 간다는 말 있다. 지금 삼성을 보면 이병철 창업자, 이건희 전 회장, 지금의 이재용 회장까지 이제 삼대째다. 옛날 말중에 완전히 틀린 말 없다.

총각때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핵가족에서 살았기 때문에 익숙한 가족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뀌었다, 자녀 계획은 순수하게 나(부부)의 결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존엄한 한 인격체가 자기의 삶의 질을 계획하여 결정한 것이다.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결정을 무르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 무엇이든, 그 결정을 내림으로써 수반될 행복과 희생의 균형,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계산을 본인들이 경험과 생각의 수준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거대한 인센티브다. 삶에 있어 모든 것이 보상과 처벌의 총합이다. 미시적으로 이는 불합리성과 불평등, 각종 부정적인 인간들의 결정들로 보이지만, 저 멀리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비가역적이고 불가피한, 혹은 자연적인, 우주 운동의 단면으로 느껴진다. 우리 부모세대는 제조업을 기반한 높은 금리 시대를 사시면서 성실, 근면, 정직을 모토로 살다보면 적어도 중산층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 가장 큰 자산을 축적한 세대이기도 하다. 근데 이들은 동시에 부모를 부양하면서 자식세대도 지원해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가장 많은 수능생을 배출한만큼 무한 경쟁 사회를 살면서 사교육 산업을 키웠다. 남을 찍어 내려야 내가 오르는 세대의 마지막이 될 듯하다. 또 해외 유학이 평범해지고 개인의 자유를 제대로 즐기는 세대이기도 하다. 평균 올려치기와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 국가 경제는 축소하고 있다. 산업의 허리가 휘청한다.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같은 중산층 진입 공식으로 자녀를 키우려고보니 원가가 너무 높다. 자식 농사가 영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즐기고 싶은 욕구와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녀 계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고무줄이 조금 극단적으로 늘었다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 또한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인센티브를 찾아가는 과정을 산다. 만약 자녀를 갖기로 선택했다면 아이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택한 것이고, 동시에 배로 늘어날 책임감을 각오하는 것이다. 만약 자녀 부양력이 없다면 나뿐 아니라 가족을 빈곤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 모습을 신의 섭리라고 멜서스는 말한다. 내가 멜서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누구라도 만일 일가를 먹여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가질 보장만 생긴다면 거의 모두가 가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빈곤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면 인구는 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에 틀림없다. 산업과 행복이 발달/증진된다면 각 세대는 점차로 많은 향락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의 체질상으로 보아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인구 수의 증가가 그들의 생계 수단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 필연적 결과로서 행복과 인구가 계속 감퇴되는 현상, 즉 퇴보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선과 악의 주기적 반복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선악의 주기적 반복현상이 곧 주기적 빈곤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멜서스가 책에서 말했다. 그는 이어서,

“빈곤의 원인은 바로 개개인에게 있다는 것, 그 빈곤의 구제수단은 바로 그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이 사는 사회도 또한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부도 이에 대해선ㄴ 아무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 사회와 정부는 그들을 구제하고자 아무리 열렬히 어떤 정책을 기획한다 할지라도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그러나 불가능한 약속인 그것은 실제로 참되게 수행될 수 없다는 것, 노동임금만으로 일가를 부양할 수 없는 상황은 국가가 그 이상으로 국민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적어도 그 이상의 국민을 부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조라는 것, 그런 경우 노동자가 결혼하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는커녕 도리어 사회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동시에 자신을 궁핍 속에 빠지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신의를 배반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신이 자연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성있는 모든 인간에게 되풀이하여 들려주는 훈계를 준수하기만 하면 능히 피할 수 있는 여러 질병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 전까지는 그들이 현재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의 무모함과 태만을 정당하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찾은, 이 책에서 그의 생각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결국 내 인생의 모든 결정은 나로 말미암아 나(나의 가족)에게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쉽게 얻는다면 결정도 그만큼 쉬울 것이고, 반대급부로 쉽게 잃을 수도 있다. 반대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결정을 했다면 그 결정은 매우 신중해야할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은 오래 지속하는 것일 것이다.

글을 줄인다. 멜서스는 <자본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인구론>은 다시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쓸 때 영향을 끼쳤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유효 수요 이론을 만들었다. 멜서스는 목사인 동시에 경제학자였다. 애덤스미스의 이론이 멜서스를 거쳐 케인지안 학파로 진화하였나보다. 마치 신의 섭리가 경제에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주듯, 이 경제의 근간은 개인의 보상을 쫓는 인간의 본능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하는듯하다.

Nobody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파도가 치기 전에 바닷물은 지평선 쪽으로 쓸려간다. 휘몰아칠 파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바닷물을 쓸어 담아간다. 파도가 높으면 해안가에서 쏟아붓는 힘도 크다. 그렇게 쉼 없이 모래사장을 때리다 보면 해안선은 조금씩 그 모양이 바뀐다. 파도는 이렇게 끊임없이 내가 바라보면 지평선의 모습을 바꾼다. 오늘은 어제와 같을 수 없다.

파도는 바람이 바다 표면을 밀어서 생긴다. 바람의 세기, 지속 시간, 그리고 바다가 넓을수록 파도는 더 커질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바다 표면에 마찰을 일으킨다. 이 마찰력이 물을 움직이게 하고, 이 에너지가 파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지진이나 해저 화산 폭발도 파도를 만들지만 의미에서 보면 바람이 파도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 유체역학을 문과적으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바람이 바닷물을 살짝 밀었을 때 물 표면에 마찰을 일으킨다. 이 마찰력은 가만히 있던 물 표면의 물 분자들을 밀고, 밀쳐진 물 분자들은 또 그 아래에 가만히 있던 물 분자들을 밀고 당기면서 운동 에너지가 퍼져나간다. 여기서 물 자체는 큰 거리를 이동하지 않고 에너지만 전파된다. 물 분자들이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물결’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물결은 일상의 루틴이나 패턴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파도는 바람이 일으킨 잔물결에서 시작된다. 에너지가 쌓이고 커지다 보면 이 파도가 눈에 보일 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더 세게, 더 오래 불수록 파도는 더 크고 힘차게 움직인다.

내 마음은 망망대해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먼바다와 같다.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처음 분 바람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화창한 날에도 잔잔한 바람은 있었고 세찬 비바람이 부는 날도 있었다. 내 마음은 운동 에너지를 머금고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부딫히는 곳이다. 단 하루라도 나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 적이 없다.

익숙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기대와 욕망이 피어나면 바람이 잔잔하게 일기 시작한다. 익숙한 일상이 언제라도 180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바람이 강해지기 위해 시작한다. 이 바람으로 내 마음이 넘실댄다. 이제 파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내가 루틴이라고 불리는 일상과 조건들은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전복되어 산산조각 나야 한다. 내 맘속에 부는 바람이 세게, 오래 불고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변화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과거와 환경을 부정한 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이 내가 경험에서 온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다를‘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믿으려면 ‘다름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추구하는 말은 무언가를 쫓아가며 간절히 찾는다는 뜻이다. 뭔가 중요한 것을 위해 뒤를 쫓아가는 그림으로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맹목적인 followship의 자세로는 절대 다를 수 없다. 달라지려면 비판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람도 내 것이고, 그로 인한 파도도 모두 내 것이다. 내 마음속 바다는 주체성, 혹은 자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름에 걸맞게 나의 길을 찾아간다.

추구가 방향을 따르는 것이라면, 자립은 방향을 창조하는 것일 테니까. 우린 방금 멋진 결론에 도달했다.

“Empty your mind. Be formless, shapeless, like water. Now you put water into a cup, it becomes a cup. You put water into a bottle it becomes a bottle. You put it in a teapot it becomes the tea pot. Water can flow or it can crash. Be water, my friend”

– Bruce Le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