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컨텐츠

(1) Fear of what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어느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의 결과가 가져올 미래에 경외감을 가진적이 있었던가. 진정한 두려움을 품은 가운데 일을 실행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일이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틀어질까봐 따위의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일이 완성에 다다랐을 때 그 결과가 어떤 변화를 의미할지에 대해, 순수한 두려움을 가지고 무슨 일을 진행해본 적이 언제였나.

(2) Binary(This or That)

생명을 가진 것들은 2지선다형 선택지를 탈출할 수 없다.

하냐 마냐, 이렇게 하냐 저렇게 하냐, 범위 그 이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세상은 2차원일 수 있다. 이쪽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사소한 선택 하나 때문이다. 딱 그게 다다. 내가 스스로 내 선택지를 꼬아서 다차원화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자유롭게 차원을 이동할 수 있다.

(3) Decimal Points(0.xxx)

아침 수영을 마치고 체중계에 오를 때마다 다른 숫자를 만난다. 어제 아침에는 61.0kg 이었는데 오늘은 61.7kg이다. 소수점까지 봐야 어제와 다른 나를 알 수 있다. 소수점 자리의 숫자들은 정수만큼 관심을 끌지 못 한다. 소수점이야말로 질리지 않는 숫자이면서 잠재력을 내포하는 숫자다. 9.0에서 10.0을 가려면 정수에선 하나 차이지만 소수점 한자리가 10단계 올라야 한다. 너와 나는 겉으론 비슷해보여도 속은 열끗 차이다.

(4) 내 일의 스케일

현명한 분이 자기가 하는 일의 스케일을 알라 하였다. 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까?

스케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이 일이 내 손에 떨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연관성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 일이 존재하는 환경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인 것 같다. 스케일을 이해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 게임의 룰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일을 하든 그 마음이 단단하면 기세가 좋다. 결정을 했으면 못 먹어도 Go다.

성경에 있는 달란트 이야기가 생각난다. 주인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신의 세 명의 종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겼다. 5달란트를 받은 자는 주인이 떠나자 마자 장사를 하여 5달란트를 남겼고, 2달란트 받은 자도 같은 방법으로 2달란트를 벌었다. 근데 1달란트 받은 자는 그 돈을 그대로 땅에 묻어둔다.

돌아온 주인은 종들의 결산보고를 듣는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더 벌어온 두 종에게는 칭찬을 하는데, 칭찬의 내용은 100% 수익률을 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종들이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했기 때문이었다. 종들에게 맡겨봤자 얼마나 큰 돈을 맡겼겠으며, 또 얼마나 큰 수익률 기대를 하고 갔겠는가. 그럼에도 두 명의 종은 주인이 명령한 소임의 스케일을 이해한 것 같다.

반면에, 주인의 돈을 잃을 두려움에 땅에 1달란트를 묻어두었던 종은 게으르고 나약하다며 꾸짖음을 당했다. 주인 돈을 어디에 꼴아 박지 않고 그대로 돌려주었음에도 왜 혼이 났을까? 처음부터 종들에게 이러한 시험을 준 주인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1달란트를 받은 종도 다른 두 명의 종처럼 주인이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 이해하고 자기의 능력선에서 실행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인의 1달란트를 맡게 된 종이다. 나는 내 일의 스케일을 진짜 알고 있나?

(5) 현타가 온다

일을 하다가 현타가 왔다는 건 심한 무력감이 찾아왔다는 것인데, 어쩌다 이 심한 무력감에 속수무책으로 저항할 수 없었냐가 진짜 물음일 것이다. 이 무력감의 근원을 찾아가다보면 무엇이 나올까, 무엇이 트리거(trigger)가 되었을까.

1/ 내 앞에 있는 문제가 나를 쉽게 압도해버려서: 문제 존재 자체가 내게 주는 스트레스를 탈압박하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주변 동료들과 함께 찾아보기.

2/ 한 번 더 노력해볼 의지보다 노력하지 않을 충동이 더 커서: 내 one more time의 의지를 꺾은 원흉을 제거할 수 있는가? 지금의 충동을 이겨낼 수 있는가?

3/ 과거에 해결하지 않고 뭉개던 것이 원인이 되어 더 큰 문제로 되어 나타났을 때: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원인의 존재를 알고 있고 해결할 의지가 있는가?

(6) 나는 회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회사가 지금 잘 드는 가위를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잘 드는 칼을 만들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근데 간혹가다 가위칼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한다. 뭐가 됬든 자르는 것을 만들고 싶은거라고? 그럼 회사는 이것을 팀원들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직원들은 각자의 주관에 빠져서 이것이 가위에 가까운 물건인지, 혹은 칼 두 자루를 붙인 물건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설명 없이는 직원의 재능과 충성심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끝없이 탓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밭이 자연스레 나아지지 않는다. 콩을 심어야 콩을 수확하듯, 경영자는 자기의 밭을 탓하지 말고 내가 밭에 내가 거두기 희망하는 씨앗을 확실히 심었는지를 돌이켜봐야한다.

(7) 직관적이지 않으면 답답하다

바꿔 말하자면, 여백의 단어들을 많이 쓰면 해석이 여지도 커진다는 뜻이고,

바꿔 말하자면, 추상적인 표현은 사적인 표현이라는 뜻이고,

바꿔 말하자면, 중요 대상을 은유법을 사용해 언급한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자면, 내가 계속 이렇게 말을 바꿔서 설명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일을 할 때 쓰는 단어들은 언제나 일 자체가 주인공이어야한다. 일 자체가 항상 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화자들의 기분이나 발언의 이유가 관심 대상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일에 관련한 언어는 직관적이고 답답하지 않아야 한다.

(8) 항상 예술인으로 살 수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급류다. 접하는 컨텐츠의 8할은 누군가의 논설이거나 관찰이다. 타인의 주장과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만 경계하는 이유는 나의 독립적인 가치 판단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그보다 나 스스로를 일말의 자비 없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것은 무엇일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관찰하여 확증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 눈에만 매일 새로운 해가 뜬다면 이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견해다. 매일 새로운 해가 뜨는 것은 내 가족과 친구들 모두 동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근데 나 스스로에 대해 객관화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관적인 견해를 축적하다보면 객관화가 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주관적 견해가 만들어지는 재료가 나 자신인데, 재료는 놔두고 남들의 말만 듣는다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에 불성실하다는 말이다.

과확이 객관적인 학문인 이유는 주관적인 가설과 관찰 경험들을 편견 없는 실험으로 입증하였고, 누구든 원하면 그 실험을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학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나만의 철학적인 주관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보면서, 나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할 수 밖에 없는 편파 없는 데이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술적으로 접근하여 실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9) 카오스 속에 안정이

우리가 하루를 시작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12시 00분은정오, 그 12시간 이후에는 자정이 된다는 사실뿐이다. 그 사이에는 확실히 일어나기로 보장된 것은 없다. 이 전제하에 우리는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고 최적의 환경은 자연스레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에겐 하루의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그 속에 어찌 저찌 끼워넣고 우겨넣었던 해야 할 일들을 완수했다는 사실만 남는다.

(10) 숨통

숨통은 모든 장기전의 시작이다. 마라톤 시작 전 가볍게 뛰어주어 숨통을 미리 틔워야 시합 시작 후 심장 박동이 갑작스레 높아지지 않는다. 심장 박동이 급격히 올라가면 많은 호흡이 필요하고, 그만큼 체내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것이고, 그만큼 체력이 고갈되어 중간에 퍼질 수 있다.

최근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숨통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수영에선 내가 원할 때 숨을 쉴 수 없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숨통을 틔우지 못 하면 나는 계속 물과 싸워서 이겨야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데, 이러면 수영을 즐기지 못한다. 수영이라는 것이 단순히 물 속에서 숨쉬며 헤엄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나는 수영을 즐기고 싶다. 오랫동안 즐겁게 수영하고 싶다면, 물의 저항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급하지 않게 임해야 한다. 그래야 숨통이 조금씩 트기 시작한다.

fin.

보이지 않는 것과 경쟁하세요?

호주 한달살이의 후유증이 지속된다. 지난주 한국에 돌아와서 기침 감기로 한동안 고생을 좀 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두꺼운 옷을 껴입었지만 썰렁한 공기가 가슴에 차는게 심상치 않았는데, 결국 복귀 신고식을 호되게 치렀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3월의 한국 날씨가 더 시리게 느껴진 것은, 내가 남반구에서 느꼈던 햇살과 공기에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예전 직장 상사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한 달간 호주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살다가 지난 주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은 많이 춥네요, 원래 이렇게 추웠죠? 제 피부로 느끼는 기온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온도 말씀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호주 좋죠, 땅만 파먹고 살아도 잘 사는 나라잖아요. 걱정이 뭐가 있겠어요, 1년 내내 따뜻한 날씨 속에서.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 경쟁할 뿐이죠.”

안 보이는 것들과 경쟁하는 나라, 누구보다는 잘 살기 위해 뭔가라도 가지려고 버둥거리며 사는 곳.

같은 날, 저녁 모임에서 비슷한 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서로 자기가 쓰는 과외 선생님 정보도 함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학군, 동네,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 엄마들의 대화에서 경제적 능력과 직업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 속 경쟁 심리는 부모들의 입 속만 바짝바짝 마르게 하는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더 가혹하고 메마른 조건들을 만들고 있다. “엄마, 나도 ㅇㅇ랑 같은 학원 다니고 싶어요. ㅇㅇ야, 미안하지만 현실적으로 ㅇㅇ와 같은 수업을 들을 방법이 없단다.” 돈이 많은 집이든 적게 가진 집이든, 다음 세대에게 밝은 미래 대신 스포트라이트가 번쩍거려 낮과 밤 분간이 안되는 콜로세움 경기장을 만들어주고 있다.

누군가보다 앞서거나 이기려는 조바심. 뭔지 모르겠고 계속 승부를 보는 마음가짐. 절대 가만 둬선 안 되는 또래에 뒤쳐진다는 느낌.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는다. 인간 먹이 사슬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서로를 착취하는 제로섬 게임을 한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결국 피 혹은 눈물을 봐야 끝나는 게임.

최근 들어 약자로 벌어먹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이 부류의 인간을 가장 하등한 인간으로 보고 상종하지 않는다. 나이가 훨씬 어려서, 갓 입사해서, 갓 배우기 시작해서, 순하거나 희생할 줄 알아서 약자처럼 취급한다. 누구나 약자였던 때가 있고, 때로 낮은 자리에 있게 된다. 나는 상대적 약자를 이용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을 혐오한다. 동방예의지국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우린 이웃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범절대신 즉각적인 우월감을 선택한다.

이제 집에 간다. 집 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는 중 옆에 포르쉐가 스윽 선다. 아무리 요새 거리에 고급차가 많아졌다해도 포르쉐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런게 바로 예술에 근접한 공산품이지, 하며 창문 너머로 몰래 감상하던 중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다. 그리자 울려 퍼지는 클락션 소리. 멋진 차에 비해 경솔하기 그지없는 클락션 소리 삥!삥! 1초도 앞 차를 기다려줄 마음이 없는 주인 덕분에 그 차는 그냥 멋 없이 거슬리는 차로 전락해버렸다.

난 이것들이 모두 나 하나의 걱정에 그쳤으면 한다. 다만,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맡은 공기 안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나 또한 ‘잘 살아야지, 더 많이 벌어야지’ 같은 생각을 숨 쉬듯 해왔다. 나도 모르게 이런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경쟁하기 위해 나를 잡아먹듯 살고 있다. 누가 잡아먹혀야 끝날까?

fin.

I will never be an Aussie

여행이란건 시간을 압축해서 살아보는거다. 여행은 여기 저기 들르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날이 정해진 시간 안에서 내 감수성과 포용력을 최대한 활짝 열고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직접 느껴보는 체험이다.

호주에서 한 달을 살았다. 멜버른에서 3주, 시드니에서 열흘이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사흘을 남긴 지금, 바로 내일 아침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해본다.

결국 돌아가는구나, 이제 진짜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작은 안도감이 들 것 같다. 우리는 두 도시에서 지내면서 5개의 숙소를 옮겨 다녔다. 멜버른 Fitzroy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 Cairo에서 멜버른 생활을 시작했고, Flagstaff Garden 옆 오피스텔, Great Ocean 로드 트립 중에 머문 Seacroft Estate를 지나 다시 Fitzroy로 돌아와 가장 마음에 든 숙소에서 멜버른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시드니에서는 Surry Hills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멋진 courtyard도 있는 이곳은 시드니에서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집이다. 시드니에 도착한 날 Mardi Gras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 작은 언덕의 이 동네를 거닐며 평화롭고 선선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우리가 묵은 숙소들은 모두 각자의 색깔과 장, 단점이 분명해서 나름의 재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숙소를 옮겨 다니는 일이 간편하지는 않았다. 캐리어 3개를 끌며 트램으로 이동하면 금방 지친다. 그럼에도 우린 다투지 않고 둥지를 옮겼다.

막상 돌아간다니 호주에서 느끼던 하루의 햇볕, 바람, 초록초록함이 벌써 그립다. 호주의 날씨 하나는 정말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럭키한 나라, 호주인들의 성격 형성에 기후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호주는 광활한 땅에 다양한 남반구 기후를 가지고 있는 축복받은 섬나라다.

이 나라의 시간은 조금 더 천천히 가는 것 같다. 이곳의 따뜻한 바람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강렬한 햇볕 아래에 있는 그늘에 머물게 만든다. 여기 사람들의 생체 리듬도 자연과 잘 싱크되어 있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에 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연의 리듬에 맞춘 생활이 어찌보면 흘러가는 삶, 무리하지 않는 삶과 닮았다. 그리고 호주인들은 이런 삶이 좋은 삶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호주에서의 한 달이 좋았냐라고 묻는다면 뭐라 말 해야할지 조금 고민할 것 같다.내게 익숙한 도시 생활, 여행객으로선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물가, 낯설지만 경이로웠던 자연, 알아 듣기 어려운 호주 영어를 쓰는 이곳 사람들 속에서 한 달을 지내다보면 답변은 보통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멜버른은 천진난만함을, 시드니는 우아함을

짖궃게도 멜버른과 시드니중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답을 내리지 못 할 것이다. 멜버른과 시드니 사람들의 기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둘은 정말 다른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말하면 난 멜버른에 더 이끌렸다.

나는 멜버른을 천진난만함을 지닌 도시라고, 시드니는 우아함을 지닌 도시라고 답 하겠다. 멜버른에서 먼저 3주를 보내 다행이란 생각이다. 평평한 땅에 사는 이 심심한 사람들은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들을 많이 한다. 재밌는 F&B도 많아 여행하는 맛이 있는 애어른 같은 도시. ‘로컬 단위’로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사는 조금은 낡은 도시. 덕분에 이 독특한 지역성, 폐쇄성을 지닌 문화를 세계에 수출하는 도시가 된 멜버른, 섬나라의 특징인가?

시드니는 멜버른에 비하면 훨씬 우아하고 expressive한 도시다. 마치 멜버른이라는 사촌 동생을 둔 잘 나가는 사촌 언니 느낌이랄까? 시드니 3일차부터 왜 시드니에 오고 싶어하는지 알겠더라. 영국 포츠머스에서 열한 척의 배를 타고 넘어 온 백인들이 쌓아온 도시 역사에 수준 높은 섬세함이 켜켜히 뭍어있는 도시다. 시드니의 CBD는 멜버른보다 훨씬 크고 글로벌 회사들이 많아, 일하는 어른들의 도시라는 느낌도 물씬 든다. 각자 성공을 찾으러 온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만드는 이 다이나믹하고 exclusive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다.

어느쪽이 더 멋진 도시 같고 이런 것은 없다. 그리고 호주인들이 전반적으로 친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여행객이라고 더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느낌이었고, 또 시드니에서는 대부분이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는 사람들이다보니 업장마다 서비스 수준이 다른 느낌이다. 나도 이것에 대해 별 의견은 없다. 여느 사람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쨋든 원래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서 할 것들이 많다. 아니 많은가? 긴 여행의 목적이 돌아가서 해야할 것들에 대한 우선순위 재정립이 아니었나? 어쩌면 여행 기간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불안함의 원인은 이것인 것 같다. 다~ 하려고 하는 것, 어떻게든 시간 안에 모든 계획을 끼워넣으려는 강박.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누굴 위한 그 모든 것인가? 나의 행복/만족감의 7~80%는 제일 중요한 일 하나에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빈 곳에 다른 목표들로 채우지 말자는 것을 호주에서 배우고 간다. 여기서 내가 본 호주 사람들은 시간을 악착같이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곧 한국 사회 속으로 돌아가는 입장에서 이것은 호주란 나라가 받은 축복이자, 이 거대한 섬나라만의 way of life라 생각하겠다.

돌아가면 해결되지 못 하고 산적한 문제들이 나를 반길 것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핸드폰 비행기 모드를 풀면, 신한은행의 보증금 대출 이자 납입 안내 문자가 와 있을 것이고, 통신비 청구서 문자가 있을 것이고 오늘자 신문이 문 앞에 와 있을 것이다.

내가 부재했던 이 세상에 달라진 것은 없다. 나조차도 한 달간의 자리비움을 통해 변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다. 복귀한 삶에 내가 어떤 의미를 새길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