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서스 <인구론>

우리 아빠는 8남매의 장남이다. 우리 엄마는 4남매의 차녀다. 어릴적엔 명절마다 내 또래의 사촌들로 항상 북적였다. 내 위아래로 사촌들만 열댓명인데, 좁은 시골 할머니집에서 밥 시간이 되면 불만 없이 상 앞에 옹기종이 낑겨 앉아 밥도 잘 먹고 어른들이 주시는 과일도 잘 먹었다. 집 밖에 나가면 온동네가 놀이터였다.

초중고시절에 살았던 아파트에도 내 또래들이 한트럭이었다. 옆집에도 동갑 친구가 살았다. 그래서 내게 북적거림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남들보더 좀 더 앞 서야 하는 것이란,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소양이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양옆에 있는 애들보다 더 잘 하는 것. 그 이유를 찾는 일은 서랍에 넣어둔채 그냥 책상 위에 놓인 정답이 있는 문제만 열심히 풀어재꼈다.

그런 우리가 최근 몇 년전부터 대한민국 소멸론을 듣고 있다. 혼기의 총각들과 아가씨들이 결혼을 안 한단다. 젊은 부부들은 어른 세대만큼 애들을 안 낳놓는단다. 이미 애완견 유모차 판매가 아기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 근데 잠깐, 내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상황에 열을 올리지? 올해 우리 부부는 첫 아들을 맞이하는데. 우리 가족 앞가림만 잘 하면 될 일 아닌가.

<인구론>을 쓴 맬서스는 영국에서 태어난 1766년생 목사다. 32세에 <인구론> 초판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어제 쓰여진 책처럼 많은 부분에서 나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느낀 멜서스는, 속은 인간에 대한 열렬한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겉으로는 끝까지 차가운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진 과잉 인구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례로, 멜서스 트랩(The Malthusian Trap)이란, 인구를 지탱하는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과잉 인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들로 다시 인구가 억제되어 다시 식량 생산 수준으로 떨어짐을 반복한다는 끊임 없는 굴레를 말한다. 딱 적절한 인구가 유지되는 골디락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문명 사회를 거쳐 근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인구는 항상 과잉과 부족 사이를 넘나들었다. 먹을 게 없어서 뭐든지 줏어먹던 시절에는 먹을게 없으니 뺏어서라도 내가 살아야했다. 그러니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야만의 시간이 있었다. 이후 토지를 사용해서 식량을 생산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인구가 너무 늘다보니 농업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고, 수요 대비 공급이 초과하니 자연스레 노동 임금이 하락한다. 이렇게 되니 다시 모두가 빈곤해지는 상황이 온다. 멜서스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태동할 때 태어났는데, 증기 기술로 방직 산업이 크게 성장할 때 신규 노동 수요가 창출되면서 열악한 환경이지만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때 얼마나 노동 수요가 높았는지는 아동 노동자들이 합법이었다는 역사가 말해준다. 하지만 다시 이때 창궐한 빈곤, 질병, 도덕의 추락 등으로 인해 인구가 준다.

멜서스는 질병, 빈곤, 전쟁과 같은 인구를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사건들이 꾸준히 역사에서 발견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 문화, 교리, 정책, 산업 변화 등의 인구를 ‘예방적으로 억제하는’ 장치들이 계속해서 ‘인구 과잉’을 막았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한 국가에서 기존 산업 체계에서 적극적인 억제 사건이나 예방적인 억제 장치가 없다면 인구 과잉은 잉여 노동력을 발생시키고, 그렇게 노동 임금이 떨어져 대다수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는 것이 뭉뚱그려서 묘사한 멜서스의 관점이다.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관찰과 통찰이 작금의 현실에서 얼마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대체 출산률을 하회하는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여기서 여타 선진국들보다 가장 먼저 인구 절벽에서 뛰어 국가 소멸이라는 낙하지점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지금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명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손가락질 하는 일은 소모적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자체로 자연적인 일이다). 이제 노인들은 훨씬 오래 사신다. 폐교되는 초등학교 수가 늘고 있다. 일반 직장을 다니려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다.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나는 지금 상황의 원초적 원인을, 1번으로 국가 차원의 산업 변화가 늦었다는 것을 꼽고, 그 뒤로 국가 차원의 인구 정책을 꼽는다. 그때 국가가 그리 많이 낳으라고 할 때 태어난 노동력이 대부분 지금 노동 가치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산업 경쟁력에 기여하는 수준을 말한다. 정책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해야할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지금 저 지랄을 하며 쓰는 언어의 수준을 보니 지금 우리나라 꼬라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부자 삼 대 못 간다는 말 있다. 지금 삼성을 보면 이병철 창업자, 이건희 전 회장, 지금의 이재용 회장까지 이제 삼대째다. 옛날 말중에 완전히 틀린 말 없다.

총각때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핵가족에서 살았기 때문에 익숙한 가족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뀌었다, 자녀 계획은 순수하게 나(부부)의 결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존엄한 한 인격체가 자기의 삶의 질을 계획하여 결정한 것이다.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결정을 무르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 무엇이든, 그 결정을 내림으로써 수반될 행복과 희생의 균형,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계산을 본인들이 경험과 생각의 수준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거대한 인센티브다. 삶에 있어 모든 것이 보상과 처벌의 총합이다. 미시적으로 이는 불합리성과 불평등, 각종 부정적인 인간들의 결정들로 보이지만, 저 멀리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비가역적이고 불가피한, 혹은 자연적인, 우주 운동의 단면으로 느껴진다. 우리 부모세대는 제조업을 기반한 높은 금리 시대를 사시면서 성실, 근면, 정직을 모토로 살다보면 적어도 중산층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 가장 큰 자산을 축적한 세대이기도 하다. 근데 이들은 동시에 부모를 부양하면서 자식세대도 지원해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가장 많은 수능생을 배출한만큼 무한 경쟁 사회를 살면서 사교육 산업을 키웠다. 남을 찍어 내려야 내가 오르는 세대의 마지막이 될 듯하다. 또 해외 유학이 평범해지고 개인의 자유를 제대로 즐기는 세대이기도 하다. 평균 올려치기와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 국가 경제는 축소하고 있다. 산업의 허리가 휘청한다.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같은 중산층 진입 공식으로 자녀를 키우려고보니 원가가 너무 높다. 자식 농사가 영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즐기고 싶은 욕구와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녀 계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고무줄이 조금 극단적으로 늘었다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 또한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인센티브를 찾아가는 과정을 산다. 만약 자녀를 갖기로 선택했다면 아이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택한 것이고, 동시에 배로 늘어날 책임감을 각오하는 것이다. 만약 자녀 부양력이 없다면 나뿐 아니라 가족을 빈곤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 모습을 신의 섭리라고 멜서스는 말한다. 내가 멜서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누구라도 만일 일가를 먹여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가질 보장만 생긴다면 거의 모두가 가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빈곤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면 인구는 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에 틀림없다. 산업과 행복이 발달/증진된다면 각 세대는 점차로 많은 향락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의 체질상으로 보아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인구 수의 증가가 그들의 생계 수단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 필연적 결과로서 행복과 인구가 계속 감퇴되는 현상, 즉 퇴보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선과 악의 주기적 반복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선악의 주기적 반복현상이 곧 주기적 빈곤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멜서스가 책에서 말했다. 그는 이어서,

“빈곤의 원인은 바로 개개인에게 있다는 것, 그 빈곤의 구제수단은 바로 그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이 사는 사회도 또한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부도 이에 대해선ㄴ 아무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 사회와 정부는 그들을 구제하고자 아무리 열렬히 어떤 정책을 기획한다 할지라도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그러나 불가능한 약속인 그것은 실제로 참되게 수행될 수 없다는 것, 노동임금만으로 일가를 부양할 수 없는 상황은 국가가 그 이상으로 국민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적어도 그 이상의 국민을 부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조라는 것, 그런 경우 노동자가 결혼하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는커녕 도리어 사회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동시에 자신을 궁핍 속에 빠지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신의를 배반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신이 자연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성있는 모든 인간에게 되풀이하여 들려주는 훈계를 준수하기만 하면 능히 피할 수 있는 여러 질병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 전까지는 그들이 현재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의 무모함과 태만을 정당하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찾은, 이 책에서 그의 생각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결국 내 인생의 모든 결정은 나로 말미암아 나(나의 가족)에게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쉽게 얻는다면 결정도 그만큼 쉬울 것이고, 반대급부로 쉽게 잃을 수도 있다. 반대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결정을 했다면 그 결정은 매우 신중해야할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은 오래 지속하는 것일 것이다.

글을 줄인다. 멜서스는 <자본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인구론>은 다시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쓸 때 영향을 끼쳤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유효 수요 이론을 만들었다. 멜서스는 목사인 동시에 경제학자였다. 애덤스미스의 이론이 멜서스를 거쳐 케인지안 학파로 진화하였나보다. 마치 신의 섭리가 경제에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주듯, 이 경제의 근간은 개인의 보상을 쫓는 인간의 본능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하는듯하다.

어린이들만 사는 사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세상에 발사되어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편 세상으로 사라진다. 태동하는 생명은 생장하여 성숙기를 거쳐 노화한다. 퇴장으로 포물선은 완성된다. 인간뿐 아니라 브랜드, 제품, 도시, 국가 모두 라이프 사이클을 가진다는 점에서 생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가고 있다거나 성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x린이 세대

지금 우리는 ‘x린이 세대’를 살고 있다. 주식을 갓 시작했다면 주린이, 러닝엔 런린이, 수영엔 수린이, 자전거엔 자린이, 등산엔 등린이. 접두사만 붙이면 어린이가 될 수 있다. 런린이 해시태그는 60만개가 넘고 주린이 해시태그는 30만 개쯤 된다. 등린이, 자린이, 가나다라마바사린이들의 해시태그를 합치면 우리나라 인구 절반쯤 되지 않을까? x린이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생겨났을까? 그들은 언제쯤 어린이 딱지를 뗄 수 있을까?

왜 다 큰 어른들이 미성숙기를 선택하여 남아 있기를 원할까? 초심자의 겸손을 갖기 위해서일까? 혹은 어설픔에 대한 핑계일까? 초보가 만능 벼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큰 성인들이 자기를 어린이라 자칭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먼저 어린이들은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해보았다. 호기심이 많아서 생각이 미쳐 갈 새 없이 해보고 보는 아이들. 설령 잘 못 해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봐줄 수 있는 아이들. 잘하는 것보다 그것을 하려는 태도에 더 많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대상. 조급함 없이 지켜봐줄 수 있고 여린 몸이 심하게 다치지 않게 보호해줘야 하는 약자들이다.

아이들의 특징들을 다 큰 어른들이 원한다고 생각해보면 이상하다(uncanny). 호기심과 적극성, 열심까지는 좋다. 그걸 넘어서 어른들이 스스로 나를 배려해주고 너그러운 눈빛으로 지켜봐달라는 태도는 어딘가 부담스럽다.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의 본업이나 사이드 프로젝트에선 그 누구보다 프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선 x린이가 되는 것을 취사선택한다. 설명하기 어려워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짜 초보 운전

우리나라 차도만큼 초보들이 많은 곳도 없을 것이다. “나는 초보입니다. 내 차는 느립니까 알아서 돌아가세요. 나는 뭐가 액셀이고 브레이크인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저는 직진만 합니다.” 이런 수동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들은 ‘나 분명히 약자라고 했으니까 니네가 알아서 잘 하세요’ 라고 들린다. 각자 교통 법규를 준수하고 양보 운전을 하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메시지들이 팔릴까.

이런 차들이 차도에 많아지면 전체 운전자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기적인 메시지들은 혼란을 불러 일으킬뿐이다. 해외의 범퍼 스티커들은 단순 유머나 자기의 소속, 신념을 담은 메시지가 대다수인데 우리나라는 내 차가 양보 받을 수 있는 표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나보다. 피해를 보는 것은 진짜 초보 운전자들이다.

살살해~ 사회

언제부터 우리들은 좀 봐 달라는 시선을 주변에 암묵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을까? 나를 더 유한 잣대로 바라봐달라고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무시 당하기는 싫지만 봐주었으면 하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왜 합의된 룰이 있음에도 개인적인 어드벤티지를 요구하게 되었을까? 전문가로 살기보다 초보와 어린이로 사는 것이 덜 팍팍한 사회가 된 것일까.

양적으로 너무 빠르게 크던 계획 경제 시절은 국가와 몇 명의 리더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드라이브가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추세였고, 이때 더 중요한 것은 방향보다 속도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 리더들이 외치던 ‘빨리 빨리’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이 과정에서 불평등과 낙오하는 분야가 생겼다는 것이다. 빨리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 미덕인 당시대의 담론은 우리 사회를 무자비하게 포식적인 성격을 갖도록 만들었다. 제대로된 성숙기를 누리지 못 한 우리 사회는 수많은 어른 아이들을 낳았다. 이 잡식성의 사회에 먹히지 않으려면 자립할 힘을 가질만큼 강해지거나, 그렇지 못 하면 내가 약자임을 강하게 어필해야하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둘 다 방식은 다르지만 살아남고 싶은 마음은 갖다.

성숙하지 않은 것이 유리한 사회. 그리고 그 미성숙함을 선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해먹는 사회를 나는 반대한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 사회가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양보와 배려, 깍두기 역할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 안에서 타인끼리 서로 제공하는 것이다. 어른은 졸업하듯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와 연결된 독립된 주체이기 때문에 안팎의 책임을 모두 갖겠다는 결심에서 출발함을 알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 귀여운 게 최고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귀여운 단계는 이미 지났어야 할 어른들이 삶의 시도와 선택에서 어린이들만의 특권을 바라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우리나라에 가짜 어린이들과 가짜 초보운전자들이 줄어들길 희망한다. 그래야 어른 대 어른으로 진정한 대화와 공평한 경쟁을 할 수 있다. 진짜 스포츠맨십이 꽃 필 수 있다. 그래야 패자도 승자만큼의 박수를 받고 응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점을 부여하려는 사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곳곳마다 다시 기울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fin.

내가 악마라면

If I were the devil

If I were the Prince of Darkness, I’d want to engulf the whole world in darkness.

만약 내가 악마라면, 내가 죄악의 왕자라면, 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것이다.

And I’d have a third of its real estate, and four-fifths of its population, but I wouldn’t be happy until I had seized the ripest apple on the tree — Thee.

내가 세상 땅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세계 인구 5분의 4를 내 아래에 둘 것이다. 하지만 난 나무에서 가장 무르익은 열매를 내 손에 들기 전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너(인간) 말이다.

So I’d set about however necessary to take over the United States. I’d subvert the churches first — I’d begin with a campaign of whispers. With the wisdom of a serpent, I would whisper to you as I whispered to Eve: ‘Do as you please.

그래서 나는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미국을 정복할 것이다. 먼저 나는 교회를 타락시킬 것이다. 성경에서 교활한 뱀이 달콤한 말로 이브에게 속삭이듯이, 나도 너에게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쾌락을 쫓거라’.

To the young, I would whisper that ‘The Bible is a myth.’ I would convince them that man created God instead of the other way around. I would confide that what’s bad is good, and what’s good is ‘square.’ And the old, I would teach to pray, after me, ‘Our Father, which art in Washington…

청년들에게는 성경은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게 아니라 사실 그 반대라고 속삭일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나쁜 것들이 사실 좋은 것들이고, 좋다고 말하는 것들은 고지식하고 답답한 것들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교회 장년층에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대신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헌법을 창제하신 워싱턴에 계신 우리 조상님들이시여’…

And then I’d get organized. I’d educate authors in how to make lurid literature exciting, so that anything else would appear dull and uninteresting. I’d threaten TV with dirtier movies and vice versa. I’d pedal narcotics to whom I could. I’d sell alcohol to ladies and gentlemen of distinction. I’d tranquilize the rest with pills.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조직할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저급하고 난잡한 문학이 재밌는 것이고 그 밖에 나머지는 지루한 창작물이라고 설파할 것이다. TV는 더러운 영상들로 채울 것이다. 또 나는 누구든지 원하면 마약에 손을 대도록 만들 것이다. 모든 남녀에게 술을 팔 것이고, 항정신성 약들로 고분고분하게 만들 것이다.

If I were the devil I’d soon have families at war with themselves, churches at war with themselves, and nations at war with themselves; until each in its turn was consumed. And with promises of higher ratings I’d have mesmerizing media fanning the flames.

내가 악마라면 가족끼리 싸우게 만들 것이고, 교단 분열을 조장할 것이며, 국가들이 서로 전쟁하여 한 쪽이 끝을 보게 할 것이다. 시청률만 생각하는 미디어들이 이러한 분열과 전쟁에 불을 지펴줄 것이다.

If I were the devil I would encourage schools to refine young intellects, but neglect to discipline emotions — just let those run wild, until before you knew it, you’d have to have drug sniffing dogs and metal detectors at every schoolhouse door.

내가 악마라면 학교가 학생들의 지성을 키우되, 그들의 감정과 정서를 훈련하는 교육들은 뺄 것이다. 학생들이 자기 기분이 내키는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두다보면 어느새 모든 학교마다 마약 탐지견과 금속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Within a decade I’d have prisons overflowing, I’d have judges promoting pornography — soon I could evict God from the courthouse, then from the schoolhouse, and then from the houses of Congress. And in His own churches I would substitute psychology for religion, and deify science. I would lure priests and pastors into misusing boys and girls, and church money. If I were the devil I’d make the symbols of Easter an egg and the symbol of Christmas a bottle.

10년 안에 모든 교도소가 수감자들로 넘치게 만들겠다. 판사들이 외설물을 홍보하게 만들다 보면 법정에서 기독교가 퇴출될 것이고, 그 다음 학교와 의회에서도 기독교리가 자리를 잃을 것이다. 교회는 교리대신 심리학을 설교하게 할 것이며 과학을 신봉하게 만들 것이다. 성직자들과 목사들이 어린 아이들과 교회 공금에 손을 대도록 꾀어낼 것이다. 내가 악마라면 부활절은 삶은 계란을 먹는 날로, 성탄절은 술 마시는 날로 상징화시켜 그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다.

If I were the devil I’d take from those who have, and give to those who want until I had killed the incentive of the ambitious.

내가 악마라면 가진자들의 돈을 뺏을 것이고 달라고만 하는 게으른 자들에게 줄 것이다. 이렇게하면 사람들의 꿈과 야망, 동기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And what do you bet I could get whole states to promote gambling as the way to get rich? I would caution against extremes and hard work in Patriotism, in moral conduct. I would convince the young that marriage is old-fashioned, that swinging is more fun, that what you see on the TV is the way to be. And thus, I could undress you in public, and I could lure you into bed with diseases for which there is no cure.

그리고 모든 나라가 국민들에게 도박을 하도록 장려하게 만들 것이다. 애국심과 도덕심을 갖고 힘든 일들은 하지 말라고 권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TV에서 묘사하는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고 할 것이고, 결혼은 구시대적 발상이므로 자유로운 성생활이 쿨한 것임을 알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알아서 공공장소에서 스스로 자기 몸을 노출할 것이고, 잠자리를 갖고, 평생 고통 받고 살아야 하는 성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In other words, if I were the devil I’d just keep right on doing what he’s doing.”

결국 내가 악마라면 지금 악마가 하고 있는 짓들을 똑같이 할 것이다.

Paul Harvey

Paul Harvey News and Comment, ABC Radio Network, 1965

Source: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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