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만 사는 사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세상에 발사되어 포물선을 그리며 반대편 세상으로 사라진다. 태동하는 생명은 생장하여 성숙기를 거쳐 노화한다. 퇴장으로 포물선은 완성된다. 인간뿐 아니라 브랜드, 제품, 도시, 국가 모두 라이프 사이클을 가진다는 점에서 생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성숙해가고 있다거나 성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x린이 세대

지금 우리는 ‘x린이 세대’를 살고 있다. 주식을 갓 시작했다면 주린이, 러닝엔 런린이, 수영엔 수린이, 자전거엔 자린이, 등산엔 등린이. 접두사만 붙이면 어린이가 될 수 있다. 런린이 해시태그는 60만개가 넘고 주린이 해시태그는 30만 개쯤 된다. 등린이, 자린이, 가나다라마바사린이들의 해시태그를 합치면 우리나라 인구 절반쯤 되지 않을까? x린이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생겨났을까? 그들은 언제쯤 어린이 딱지를 뗄 수 있을까?

왜 다 큰 어른들이 미성숙기를 선택하여 남아 있기를 원할까? 초심자의 겸손을 갖기 위해서일까? 혹은 어설픔에 대한 핑계일까? 초보가 만능 벼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큰 성인들이 자기를 어린이라 자칭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먼저 어린이들은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해보았다. 호기심이 많아서 생각이 미쳐 갈 새 없이 해보고 보는 아이들. 설령 잘 못 해도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봐줄 수 있는 아이들. 잘하는 것보다 그것을 하려는 태도에 더 많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대상. 조급함 없이 지켜봐줄 수 있고 여린 몸이 심하게 다치지 않게 보호해줘야 하는 약자들이다.

아이들의 특징들을 다 큰 어른들이 원한다고 생각해보면 이상하다(uncanny). 호기심과 적극성, 열심까지는 좋다. 그걸 넘어서 어른들이 스스로 나를 배려해주고 너그러운 눈빛으로 지켜봐달라는 태도는 어딘가 부담스럽다.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의 본업이나 사이드 프로젝트에선 그 누구보다 프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선 x린이가 되는 것을 취사선택한다. 설명하기 어려워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짜 초보 운전

우리나라 차도만큼 초보들이 많은 곳도 없을 것이다. “나는 초보입니다. 내 차는 느립니까 알아서 돌아가세요. 나는 뭐가 액셀이고 브레이크인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저는 직진만 합니다.” 이런 수동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들은 ‘나 분명히 약자라고 했으니까 니네가 알아서 잘 하세요’ 라고 들린다. 각자 교통 법규를 준수하고 양보 운전을 하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메시지들이 팔릴까.

이런 차들이 차도에 많아지면 전체 운전자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기적인 메시지들은 혼란을 불러 일으킬뿐이다. 해외의 범퍼 스티커들은 단순 유머나 자기의 소속, 신념을 담은 메시지가 대다수인데 우리나라는 내 차가 양보 받을 수 있는 표식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나보다. 피해를 보는 것은 진짜 초보 운전자들이다.

살살해~ 사회

언제부터 우리들은 좀 봐 달라는 시선을 주변에 암묵적으로 요구하게 되었을까? 나를 더 유한 잣대로 바라봐달라고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무시 당하기는 싫지만 봐주었으면 하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왜 합의된 룰이 있음에도 개인적인 어드벤티지를 요구하게 되었을까? 전문가로 살기보다 초보와 어린이로 사는 것이 덜 팍팍한 사회가 된 것일까.

양적으로 너무 빠르게 크던 계획 경제 시절은 국가와 몇 명의 리더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드라이브가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추세였고, 이때 더 중요한 것은 방향보다 속도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 리더들이 외치던 ‘빨리 빨리’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이 과정에서 불평등과 낙오하는 분야가 생겼다는 것이다. 빨리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 미덕인 당시대의 담론은 우리 사회를 무자비하게 포식적인 성격을 갖도록 만들었다. 제대로된 성숙기를 누리지 못 한 우리 사회는 수많은 어른 아이들을 낳았다. 이 잡식성의 사회에 먹히지 않으려면 자립할 힘을 가질만큼 강해지거나, 그렇지 못 하면 내가 약자임을 강하게 어필해야하는 사회가 된 것 같다. 둘 다 방식은 다르지만 살아남고 싶은 마음은 갖다.

성숙하지 않은 것이 유리한 사회. 그리고 그 미성숙함을 선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해먹는 사회를 나는 반대한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 사회가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양보와 배려, 깍두기 역할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 안에서 타인끼리 서로 제공하는 것이다. 어른은 졸업하듯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와 연결된 독립된 주체이기 때문에 안팎의 책임을 모두 갖겠다는 결심에서 출발함을 알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 귀여운 게 최고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귀여운 단계는 이미 지났어야 할 어른들이 삶의 시도와 선택에서 어린이들만의 특권을 바라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 우리나라에 가짜 어린이들과 가짜 초보운전자들이 줄어들길 희망한다. 그래야 어른 대 어른으로 진정한 대화와 공평한 경쟁을 할 수 있다. 진짜 스포츠맨십이 꽃 필 수 있다. 그래야 패자도 승자만큼의 박수를 받고 응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점을 부여하려는 사회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곳곳마다 다시 기울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fin.

보이지 않는 것과 경쟁하세요?

호주 한달살이의 후유증이 지속된다. 지난주 한국에 돌아와서 기침 감기로 한동안 고생을 좀 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두꺼운 옷을 껴입었지만 썰렁한 공기가 가슴에 차는게 심상치 않았는데, 결국 복귀 신고식을 호되게 치렀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3월의 한국 날씨가 더 시리게 느껴진 것은, 내가 남반구에서 느꼈던 햇살과 공기에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을 거쳤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예전 직장 상사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한 달간 호주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살다가 지난 주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은 많이 춥네요, 원래 이렇게 추웠죠? 제 피부로 느끼는 기온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온도 말씀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호주 좋죠, 땅만 파먹고 살아도 잘 사는 나라잖아요. 걱정이 뭐가 있겠어요, 1년 내내 따뜻한 날씨 속에서. 한국에 사는 우리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 경쟁할 뿐이죠.”

안 보이는 것들과 경쟁하는 나라, 누구보다는 잘 살기 위해 뭔가라도 가지려고 버둥거리며 사는 곳.

같은 날, 저녁 모임에서 비슷한 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초등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서로 자기가 쓰는 과외 선생님 정보도 함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학군, 동네,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 엄마들의 대화에서 경제적 능력과 직업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 속 경쟁 심리는 부모들의 입 속만 바짝바짝 마르게 하는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더 가혹하고 메마른 조건들을 만들고 있다. “엄마, 나도 ㅇㅇ랑 같은 학원 다니고 싶어요. ㅇㅇ야, 미안하지만 현실적으로 ㅇㅇ와 같은 수업을 들을 방법이 없단다.” 돈이 많은 집이든 적게 가진 집이든, 다음 세대에게 밝은 미래 대신 스포트라이트가 번쩍거려 낮과 밤 분간이 안되는 콜로세움 경기장을 만들어주고 있다.

누군가보다 앞서거나 이기려는 조바심. 뭔지 모르겠고 계속 승부를 보는 마음가짐. 절대 가만 둬선 안 되는 또래에 뒤쳐진다는 느낌.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는다. 인간 먹이 사슬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서로를 착취하는 제로섬 게임을 한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결국 피 혹은 눈물을 봐야 끝나는 게임.

최근 들어 약자로 벌어먹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이 부류의 인간을 가장 하등한 인간으로 보고 상종하지 않는다. 나이가 훨씬 어려서, 갓 입사해서, 갓 배우기 시작해서, 순하거나 희생할 줄 알아서 약자처럼 취급한다. 누구나 약자였던 때가 있고, 때로 낮은 자리에 있게 된다. 나는 상대적 약자를 이용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을 혐오한다. 동방예의지국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우린 이웃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범절대신 즉각적인 우월감을 선택한다.

이제 집에 간다. 집 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는 중 옆에 포르쉐가 스윽 선다. 아무리 요새 거리에 고급차가 많아졌다해도 포르쉐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런게 바로 예술에 근접한 공산품이지, 하며 창문 너머로 몰래 감상하던 중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다. 그리자 울려 퍼지는 클락션 소리. 멋진 차에 비해 경솔하기 그지없는 클락션 소리 삥!삥! 1초도 앞 차를 기다려줄 마음이 없는 주인 덕분에 그 차는 그냥 멋 없이 거슬리는 차로 전락해버렸다.

난 이것들이 모두 나 하나의 걱정에 그쳤으면 한다. 다만,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맡은 공기 안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었다. 나 또한 ‘잘 살아야지, 더 많이 벌어야지’ 같은 생각을 숨 쉬듯 해왔다. 나도 모르게 이런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경쟁하기 위해 나를 잡아먹듯 살고 있다. 누가 잡아먹혀야 끝날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