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ody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파도가 치기 전에 바닷물은 지평선 쪽으로 쓸려간다. 휘몰아칠 파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바닷물을 쓸어 담아간다. 파도가 높으면 해안가에서 쏟아붓는 힘도 크다. 그렇게 쉼 없이 모래사장을 때리다 보면 해안선은 조금씩 그 모양이 바뀐다. 파도는 이렇게 끊임없이 내가 바라보면 지평선의 모습을 바꾼다. 오늘은 어제와 같을 수 없다.

파도는 바람이 바다 표면을 밀어서 생긴다. 바람의 세기, 지속 시간, 그리고 바다가 넓을수록 파도는 더 커질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바다 표면에 마찰을 일으킨다. 이 마찰력이 물을 움직이게 하고, 이 에너지가 파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지진이나 해저 화산 폭발도 파도를 만들지만 의미에서 보면 바람이 파도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 유체역학을 문과적으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바람이 바닷물을 살짝 밀었을 때 물 표면에 마찰을 일으킨다. 이 마찰력은 가만히 있던 물 표면의 물 분자들을 밀고, 밀쳐진 물 분자들은 또 그 아래에 가만히 있던 물 분자들을 밀고 당기면서 운동 에너지가 퍼져나간다. 여기서 물 자체는 큰 거리를 이동하지 않고 에너지만 전파된다. 물 분자들이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물결’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물결은 일상의 루틴이나 패턴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파도는 바람이 일으킨 잔물결에서 시작된다. 에너지가 쌓이고 커지다 보면 이 파도가 눈에 보일 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더 세게, 더 오래 불수록 파도는 더 크고 힘차게 움직인다.

내 마음은 망망대해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먼바다와 같다.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처음 분 바람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화창한 날에도 잔잔한 바람은 있었고 세찬 비바람이 부는 날도 있었다. 내 마음은 운동 에너지를 머금고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부딫히는 곳이다. 단 하루라도 나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 적이 없다.

익숙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기대와 욕망이 피어나면 바람이 잔잔하게 일기 시작한다. 익숙한 일상이 언제라도 180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바람이 강해지기 위해 시작한다. 이 바람으로 내 마음이 넘실댄다. 이제 파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내가 루틴이라고 불리는 일상과 조건들은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전복되어 산산조각 나야 한다. 내 맘속에 부는 바람이 세게, 오래 불고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변화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과거와 환경을 부정한 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이 내가 경험에서 온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다를‘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내가 다르다는 것을 믿으려면 ‘다름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추구하는 말은 무언가를 쫓아가며 간절히 찾는다는 뜻이다. 뭔가 중요한 것을 위해 뒤를 쫓아가는 그림으로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맹목적인 followship의 자세로는 절대 다를 수 없다. 달라지려면 비판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기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람도 내 것이고, 그로 인한 파도도 모두 내 것이다. 내 마음속 바다는 주체성, 혹은 자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름에 걸맞게 나의 길을 찾아간다.

추구가 방향을 따르는 것이라면, 자립은 방향을 창조하는 것일 테니까. 우린 방금 멋진 결론에 도달했다.

“Empty your mind. Be formless, shapeless, like water. Now you put water into a cup, it becomes a cup. You put water into a bottle it becomes a bottle. You put it in a teapot it becomes the tea pot. Water can flow or it can crash. Be water, my friend”

– Bruce Lee

fin.

2 Lives, 8 Miles

공자가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삶이 두 번 주어진다고. 두 번째 삶은 인생이 딱 한 번뿐임을 깨닫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이 말을 누가 소리내서 말했다면 그자체로 오그라들 수 있는데,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면 조용히 곱씹게 된다. 머릿속에 되뇌일수록 반성과 기회를 동시에 담고 있는 단단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삶의 유한함에 대한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지혜는 공통적이다. 왜냐하면 에미넴은 영화 <8 Miles>에서 ‘One shot, one opportunity’ 라고 했다. 삶을 직시하게 만드는 공자와 현실을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에미넴의 말이 요즘 내 머릿속에서 자주 상기되고 있다.

단순히 영원히 살지 못 할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보다 젊었던 어제를 그리워할 것이란 말도 아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온르의 귀함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뜻이다. 후회는 단순한 상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고통이다. 다시는 스스로 가능성을 폄하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중요한 결정을 유예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것이다. 시선을 살짝 낮춰 오늘을 살겠다는 행동이다.

꼭 함께 해야할 일이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혼자의 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가장 위에 두었다. 그러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고독의 시간이다. 그리고 조용히 반복한다. 이렇게 보내는 일과가 썩 좋다. 불필요한 내면의 동요도 없다. 이때 비로소 공자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온다.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걱정이 없는 지금이 내게 소중하다. 스스로에게 주어야할 당연한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른다는 사실 앞에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다시 에미넴 얘기를 조금 하자면, 에미넴이 <8 Miles>에서 부른 노래 제목이 Lose Yourself 다. 후렴이 이렇게 시작하는데,

‘(you better) lose yourself in the music, the moment you own it, you better never let it go. You only got 1 shot…’

후렴만큼이나 난 노래 제목 자체에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One shot’ 이나 ’The opportunity‘ 로 하지 않고 ‘Lose Yourself’ 로 제목을 정한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내 맘 속에 인생은 딱 한 번 산다는 사실이 깊이 꽃혔다면, 변화를 계획하게 되고 각오를 실천하게된다. 전과 다른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려면 나의 일부를 놓아야한다. 그동안 나에게 두 번째 인생이 남아있다고 믿게 만든 낡은 습관과 생각들을 버리는 일이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희생은 ‘진짜 필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하지만 중요했던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난 ‘lose yourself’ 를 두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1. Unlearn what you have picked up growing

2. Be present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살다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나이가 많다고 꼭 그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틀리다. 마찬가지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제공해야할 이유도 없다. 제도적 장치가 아닌 것에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기대다.

진화론자 리처드 히긴스는, 다음 세대를 희생하고 자신만을 돌본다면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했다. 장수가 더이상 ‘사회적’ 미덕이 아니게 된 지금, 손윗 사람이 나의 예우를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검증이 더 날카로워졌다. 존경심은 나이가 아니라 그 인격과 자취를 향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인격과 발자취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자리다.

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했든간에 그 자리는 앉은 사람에게 시험의 자리이기도하다. 누구에게 자리는 나의 연약한 자존심을 채워주기도 하고 든든한 돈 나올 구멍이 되기도 있다. 남들이 나보고 제발 앉아달라고 열성으로 요구하는 자리도 있는 반면 평생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미안하지만 많은 어른들이 이런 자리에 앉아있다.

인성과 능력이 어떻든간에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과분한 자리라 생각할수록 엉덩이 딱 붙이려고 애쓴다. 자기 그릇보다 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이끌어야 할 때 숨는 것이다. 용기를 내야 할 때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이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비범한 인물들과 자리 욕심만 가진 비겁한 범인들이 섞인게 이 세상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Hope is colorful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이 훨씬 인기있는 주장이다. 좋은 소식보다 불행한 소식이 뉴스거리가 된다. 불행한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 후에 분노케하고, 그리고 보통 체념케한다. 우리들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힘빠지는 소식들을 접한다. 어쩌면 나혼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과몰입한다고 생각한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남일이 그냥 남일같지 않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고 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불행한 소식을 접하면 응당 공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 아닌가? 민심을 챙긴다는둥 핵심을 빙 둘러가는 어젠다 말고, 왜 우리가 이렇게 불행한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지를 멈춰서 이야기해보려는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답을 찾을것이다. 다시 희망을 품게될 것이다. 국가적 위기 속에도 새벽마다 신문은 배달될 것이고 가게들은 지금처럼 계속 손님을 받기 위해 문을 열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반갑게 웃고 떠들것이다. 각자의 지금을 살다보면 무겁게 누르는 이 기운도 조금씩 엹어질것이다. 그러니 나도 낙천적인 기세를 잃지 않겠다.

낙관적인 사람은 때로 바보로 취급된다.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12월 내내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놀라운 변화가 보였다. 예전의 촛불집회에 비해 훨씬 칼라풀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돌 응원봉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젊은 남녀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했다. 염세적인 비평가들보다 훨씬 현실적인 일을 했다. 정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서서히 사라질지라도 행동을 촉발한 그들의 책임 의식은 기억에 남을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행동이다. 정치색을 떠나 그들은 나름의 가치 판단을 했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이 장면을 보고나니 모든 불행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순진하다고 해도 좋다. 순진한 것은 귀한 것이다.

보고싶은 것은 더 보고, 듣고 싶은 것은 더 듣고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져도 내 귀에 들리는 내용은 선명해지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분명해진다. 인간의 한계이자 능력이다. 인간이 뇌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들만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휴리스틱이라고도 하고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진화한 덕분에 인간은 신념을 유지할 수 있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절대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내가 믿는 것이 사회 다수의 믿음인지, 혹은 강력한 권력자가 어떤 믿음 체계를 가졌는지에 따라 역사가 기록되어왔다.

이 경향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숏폼 컨텐츠들은 휴리스틱이 최소 몇 배는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부추겼다. 이것이 우려되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할지 판단하기 전에 알게모르게 무엇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21세기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가 되어 선과 악을 모르는 빅브라더 기술 앞에서 저항해야한다.

오늘날의 하이테크(high tech)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하이테크는 중학교때 처음 써 본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이었다. 이 볼펜의 그립감부터 부드러운 볼의 무브먼트를 경험했을 때, ‘아, 수준 높은 기술(필기력)이다’ 라고 느꼈다. 하이테크는 보통 시중에 있는 대다수보다 수준이 높은 기술을 의미한다. 하이테크에 걸맞은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야한다. 내 기억에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은 쓸 때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펜의 등장으로 학생들은 공부량이 늘었고, 팬시 문화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발명품은 모두 하이테크일까? 그 발명품이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했다면 그렇다. 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비슷한 제품들을 선도한다는 것이니까. ‘최초’라는 타이틀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럼 ‘새로운 것’은 하이테크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새롭다는 것은 변경과 개선도 포함되는데 그것은 하이테크라 할 수 없다. one of many다. 요즘의 광고를 보면 뭐든지 하이테크다. 청소기에도 하이테크, 세탁기에도 하이테크, 의류도 하이테크다. 연구해서 개발했다고 다 하이테크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게 된 텅빈 단어가 된 것 같다.

기술이 인류 사회를 이끌고 있다. 하이테크는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기술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번번이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자연(mother nature) 대하듯 겸손해진다. 기술 체계는 이미 그 자체로 믿음(Belief system)이자 신념(Idea)이 되었다. 일론 머스크는 일개 경영인을 넘어 종교적인 인물로 격상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할 것처럼 기술의 선구자들을 신봉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믿는 것은 진정의 믿음이 아니라‘고 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전에 믿음부터 보이는 것이다.

하이테크를 대표하는 AI 과학 기술은 분명 종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비슷해 보이는 신앙심이지만 전자는 철저히 이성과 세속적인 합리성에 입각하고, 후자는 이성보다는 순수 믿음과 교리에 의존한다. 우리 인간의 삶을 더 편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종교와 과학은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만약 기술도 결국 인간의 결핍과 휴리스틱 투성이라면? 하이테크를 만드는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기술이 주는 의미가 또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개인단위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항상 긴장을 놓고 의심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을 조금 나눠보는 것이다.

Good Bye 2024,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