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객과 영업

어느 순간부터 호객과 영업이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객은 말 그대로 고객을 부르는 행위이다. 호객의 ‘호’에는 부른다는 뜻도 있는데 소리를 지른다는(소리 지를 효) 뜻도 있다. 뜻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좋은 단어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호객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러 형태의 호객 행위를 경험했었는데, 을왕리나 속초 등의 바닷가가 대표적인 장소다. 먹자거리를 걷다 보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잘해드릴게’라고 소리 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곳에서는 차의 앞을 막아서면서 주차하도록 강제한 곳도 있었다.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곳에 남산돈까스를 파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는데, 여기도 각 가게를 대표하는 호객 전사들이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마치 사냥감을 찾듯 노려보며 차도로 갑자기 뛰어드는 용감한 호객행위를 보여주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호객을 당할 때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의 고민 과정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저녁 시간에 우리 일행이 먹자골목을 걷고 있었고 배가 고팠다면 그 골목에 있는 음식점중 한 곳을 정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음식점 안을 보며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 요소인데, 호객 행위는 이런 소소한 재미를 원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행위이다. 나는 호객 행위 자체를 어느 정도 재미로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나에게 소리치는 것까지는 웃고 넘어가지만 내 앞길을 막거나 팔을 잡아끌거나 하는 순간 재미는 끝난다.

반면에 영업이라는 말은 훨씬 더 높은 위계에 있는 단어다. 영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업이란 것은 내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행위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영어로 영업을 세일즈라고 하는 것도 영리를 추구해야 하는 회사에 재산적 이익을 가지고 올 새로운 고객을 (판매를 통해)모시고 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제품을 제작할 것이 있어서 업체를 찾고 있었다. 여러 군데를 리스트업하면서 어디가 내 요구사항을 가장 잘 반영해 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쓰레드에서 한 업체를 찾았는데, 포스팅도 자주 올리고 제품 샘플 사진들과 함께 자기는 이런 것들을 다 직접 디자인했다는 둥 굉장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언제든 DM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 이 적극성을 보아하니 굉장히 성실한 프로겠구나 싶어 연락했다. 그렇게 처음 사무실로 찾아가 대면으로 만났을 때 이분은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쓰레드에서 쓴 것만큼 고객의 아이디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여기가 실력은 있겠다고 생각한 게, 자기 부모님의 제조업체를 기반으로 한 기획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자기 직감을 믿어야 한다. 실력은 있겠다는 생각 하나로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것은 내 실수였다. 이 사람은 미팅 시간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견적 내용도 제작 단계에서 누락되었다. 총체적으로 난국이었다. 내가 느낀 것은, 돈 벌 능력이 없는 사람도 호객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호객에도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그 실력의 80%는 실체가 없는 거짓말일 것이다. 호객은 일방적으로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경우가 많다. 호객 행위는 마치 악성 재고를 털어내려고 하거나, 내 가게에는 안 와도 적어도 옆집 경쟁사로 고객이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느낌이다. 호객 행위는 업장이나 고객에게 모두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한다.

시장은 원래 시끌벅적한 곳이지만 점점 시끄러운 곳이 되어감은 틀림없다. 어디를 가든 자기들이 파는 제품들을 우리 얼굴에 들이밀기 위해 혈안이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호객이고 무엇이 마케팅인지 모르겠다. 현대 마케팅이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점에서는 단체 호객 행위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근데 또 ‘호의적인 호객행위’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케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장기전에도 자신이 있다면 호객행위보다 더 나은 방식을 찾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 명의 고객을 당장의 매출 돌려막기로 보는 순간 호객행위가 되는 것이고, 다음에도 찾아줄 고객이 되거나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영업이라고 생각한다.

fin.

many gods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늘고 있다. 이미 2020년부터 미국 개신교 신자 수가 인구 절반 이하로 줄었고, 작년에 퓨리서치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거의 80%의 성인 미국인들이 본인 삶 속에서 종교의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응답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뚜렷하다. 신앙을 갖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된 것이다.

종교가 설 자리가 줄어든 배경은 다양한데, 선진국들에서 먼저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살만하니까 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미국만큼이나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데이터 결과가 나왔고, 일본에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자기는 종교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조직화하고 세력화된 종교를 떠나고 있다. 사회 세속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종교가 과거의 유물로 취급되고 있다.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대부분의 유년기부터 청소년 시절을 교회에서 보냈다. 나에게 교회는 형, 누나, 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 집단이었고, 배움의 공간이었고, 규율의 공간이었다. 매주 예배가 끝나면 교회 옆 학교 운동장에서 형 동생들과 늦게까지 축구했다. 어른들끼리 축구를 하면 패스는 거의 받지 못해도 끼워주었다. 난 교회에서 기타를 처음 배웠고 성탄절 같은 교회 행사에서 뮤지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교회에 탁구대가 있어서 예배 중간중간 사람들이랑 탁구를 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내 인격 형성 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교회라는 작은 조직된 사회였다.

내 머리가 좀 커지다 보니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을 넘어 교회에 봉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때론 답답해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 바라본 목사님과 지금 바라보는 목사님의 인식도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영향을 준 교회라는 곳을 다시 처음부터 정립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관점에서 기독 교리를 이해해 보기도 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신앙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인류의 탈종교 현상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선 사회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부유해지면서 종교 의존도가 낮아졌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두 이념은 시간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두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된 재화로써 투자의 가치를 갖게 되면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종교에 그다지 가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할 시간에 차라리 일을 더 하는 게 더 나은 내일을 보장한다는 것을 믿게 만든 능력주의의 사회(meritocracy) 속에 살기 때문이다.

나의 미국 교환학생 호스트 가족들도 모두 교회를 다녔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마다 집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했는데, 우리 가족끼리(난 당시 호스트 부모님을 아빠 엄마라 부를 정도로 가족원의 대우를 받았다)만 하지 않았고 꼭 교회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성경 구절을 정해 낭독하며 토론했다. 그게 거의 20년 전이다. 지금이었다면 아마 그 시간에 전공책을 한 번 더 읽거나 유튜브로 강의를 듣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도 나아지고 있고 인터넷을 통한 지식 습득이 보편화되면서 정보를 얻는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한다. 지금의 배움에는 엄격한 권위도 사라져, 아는 것이 선(good)인 시대를 이루었다.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하고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는 발전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궁극적인 상태는 언제나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종교가 정보와 학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에게 성경책은 필요 없는 책이 되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들 덕분에 더 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다양한 역사서를 읽어서 광범위한 역사적 지식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종교적 지도자들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수능 강사들이 연예인을 넘어 광신도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는 수험생들이 힘든 입시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절대적인 정보 전달자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종교는 핵심 사업들을 다 빼앗긴 사양 사업이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지구 최강자가 되었다. 상상력이 과학과 종교,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발전의 꽃을 거듭 피워왔다. 앞으로 인류가 모를 것은 딱 하나, 상상의 끝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도 DNA에 남겨진 진화의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인류는 약할 때 무언가를 의지해오며 생존해 왔다. 내 옆 동료에게 나의 안전을 의지하던 것이 군주, 교황, 정치 등으로 구조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그래서 유한한 목숨을 가진 인간은 결국 약해질 것이고, 그때 의지할 곳을 분명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수십 개의 신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종교는 갈 곳을 잃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신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신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었는지, 혹은 그 존재를 이제 찾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 있었기에 초지능(hyperintelligence)가 있는 것인지, 초지능이 있었고 그다음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초지능을 우리는 종교화할 것이다. 알고리즘이 교리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행동을 바꿀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듯, 우리는 알고리즘을 통한 운명론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로 오랫동안 논쟁할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종교가 신격화했던 인물들은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나를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신들은 나를 정말 잘 아는 나머지 나에게 맞춤형 교리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2진법 알고리즘을 믿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하게 새로운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바티칸이 건축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데이터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면서 데이터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LLM 기반의 추론 모델들에게 구독료라는 십일조를 바쳐가며 의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할루시네이션과같이 부정확한 정보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그들이 내놓은 답변들을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모태 LLM들은 종교가 하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파생되어 나오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알고리즘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글로벌 시대라는 말도 구닥다리 단어가 되었다. 이미 우리 인류는 초연결된 사회다. 이미 OpenAI의 LLM, 앤트로픽의 클로드, 메타의 라마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우리 개개인에게 엄청난 힘을 줄 것임이 틀림없다. 인간은 이 새로운 신(인공지능)을 통해 자신만의 구원 방식을 찾을 것이다, 혹은 만들어낼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fin.

멜서스 <인구론>

우리 아빠는 8남매의 장남이다. 우리 엄마는 4남매의 차녀다. 어릴적엔 명절마다 내 또래의 사촌들로 항상 북적였다. 내 위아래로 사촌들만 열댓명인데, 좁은 시골 할머니집에서 밥 시간이 되면 불만 없이 상 앞에 옹기종이 낑겨 앉아 밥도 잘 먹고 어른들이 주시는 과일도 잘 먹었다. 집 밖에 나가면 온동네가 놀이터였다.

초중고시절에 살았던 아파트에도 내 또래들이 한트럭이었다. 옆집에도 동갑 친구가 살았다. 그래서 내게 북적거림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니 남들보더 좀 더 앞 서야 하는 것이란,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소양이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양옆에 있는 애들보다 더 잘 하는 것. 그 이유를 찾는 일은 서랍에 넣어둔채 그냥 책상 위에 놓인 정답이 있는 문제만 열심히 풀어재꼈다.

그런 우리가 최근 몇 년전부터 대한민국 소멸론을 듣고 있다. 혼기의 총각들과 아가씨들이 결혼을 안 한단다. 젊은 부부들은 어른 세대만큼 애들을 안 낳놓는단다. 이미 애완견 유모차 판매가 아기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 근데 잠깐, 내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상황에 열을 올리지? 올해 우리 부부는 첫 아들을 맞이하는데. 우리 가족 앞가림만 잘 하면 될 일 아닌가.

<인구론>을 쓴 맬서스는 영국에서 태어난 1766년생 목사다. 32세에 <인구론> 초판을 썼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어제 쓰여진 책처럼 많은 부분에서 나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 속에서 내가 느낀 멜서스는, 속은 인간에 대한 열렬한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겉으로는 끝까지 차가운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진 과잉 인구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례로, 멜서스 트랩(The Malthusian Trap)이란, 인구를 지탱하는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과잉 인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들로 다시 인구가 억제되어 다시 식량 생산 수준으로 떨어짐을 반복한다는 끊임 없는 굴레를 말한다. 딱 적절한 인구가 유지되는 골디락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문명 사회를 거쳐 근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인구는 항상 과잉과 부족 사이를 넘나들었다. 먹을 게 없어서 뭐든지 줏어먹던 시절에는 먹을게 없으니 뺏어서라도 내가 살아야했다. 그러니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야만의 시간이 있었다. 이후 토지를 사용해서 식량을 생산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인구가 너무 늘다보니 농업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고, 수요 대비 공급이 초과하니 자연스레 노동 임금이 하락한다. 이렇게 되니 다시 모두가 빈곤해지는 상황이 온다. 멜서스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태동할 때 태어났는데, 증기 기술로 방직 산업이 크게 성장할 때 신규 노동 수요가 창출되면서 열악한 환경이지만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때 얼마나 노동 수요가 높았는지는 아동 노동자들이 합법이었다는 역사가 말해준다. 하지만 다시 이때 창궐한 빈곤, 질병, 도덕의 추락 등으로 인해 인구가 준다.

멜서스는 질병, 빈곤, 전쟁과 같은 인구를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사건들이 꾸준히 역사에서 발견되었고, 이와 함께 사회 문화, 교리, 정책, 산업 변화 등의 인구를 ‘예방적으로 억제하는’ 장치들이 계속해서 ‘인구 과잉’을 막았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한 국가에서 기존 산업 체계에서 적극적인 억제 사건이나 예방적인 억제 장치가 없다면 인구 과잉은 잉여 노동력을 발생시키고, 그렇게 노동 임금이 떨어져 대다수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는 것이 뭉뚱그려서 묘사한 멜서스의 관점이다.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관찰과 통찰이 작금의 현실에서 얼마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대체 출산률을 하회하는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여기서 여타 선진국들보다 가장 먼저 인구 절벽에서 뛰어 국가 소멸이라는 낙하지점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지금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명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손가락질 하는 일은 소모적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자체로 자연적인 일이다). 이제 노인들은 훨씬 오래 사신다. 폐교되는 초등학교 수가 늘고 있다. 일반 직장을 다니려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다.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나는 지금 상황의 원초적 원인을, 1번으로 국가 차원의 산업 변화가 늦었다는 것을 꼽고, 그 뒤로 국가 차원의 인구 정책을 꼽는다. 그때 국가가 그리 많이 낳으라고 할 때 태어난 노동력이 대부분 지금 노동 가치가 많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의 산업 경쟁력에 기여하는 수준을 말한다. 정책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해야할 나이 많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지금 저 지랄을 하며 쓰는 언어의 수준을 보니 지금 우리나라 꼬라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부자 삼 대 못 간다는 말 있다. 지금 삼성을 보면 이병철 창업자, 이건희 전 회장, 지금의 이재용 회장까지 이제 삼대째다. 옛날 말중에 완전히 틀린 말 없다.

총각때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핵가족에서 살았기 때문에 익숙한 가족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뀌었다, 자녀 계획은 순수하게 나(부부)의 결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존엄한 한 인격체가 자기의 삶의 질을 계획하여 결정한 것이다.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도 이 결정을 무르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결정이 무엇이든, 그 결정을 내림으로써 수반될 행복과 희생의 균형, 더 나아가 더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계산을 본인들이 경험과 생각의 수준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거대한 인센티브다. 삶에 있어 모든 것이 보상과 처벌의 총합이다. 미시적으로 이는 불합리성과 불평등, 각종 부정적인 인간들의 결정들로 보이지만, 저 멀리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이는 비가역적이고 불가피한, 혹은 자연적인, 우주 운동의 단면으로 느껴진다. 우리 부모세대는 제조업을 기반한 높은 금리 시대를 사시면서 성실, 근면, 정직을 모토로 살다보면 적어도 중산층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 가장 큰 자산을 축적한 세대이기도 하다. 근데 이들은 동시에 부모를 부양하면서 자식세대도 지원해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가장 많은 수능생을 배출한만큼 무한 경쟁 사회를 살면서 사교육 산업을 키웠다. 남을 찍어 내려야 내가 오르는 세대의 마지막이 될 듯하다. 또 해외 유학이 평범해지고 개인의 자유를 제대로 즐기는 세대이기도 하다. 평균 올려치기와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 국가 경제는 축소하고 있다. 산업의 허리가 휘청한다.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같은 중산층 진입 공식으로 자녀를 키우려고보니 원가가 너무 높다. 자식 농사가 영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즐기고 싶은 욕구와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자녀 계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고무줄이 조금 극단적으로 늘었다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 또한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인센티브를 찾아가는 과정을 산다. 만약 자녀를 갖기로 선택했다면 아이들로부터 받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택한 것이고, 동시에 배로 늘어날 책임감을 각오하는 것이다. 만약 자녀 부양력이 없다면 나뿐 아니라 가족을 빈곤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이 모습을 신의 섭리라고 멜서스는 말한다. 내가 멜서스와 의견을 같이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누구라도 만일 일가를 먹여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가질 보장만 생긴다면 거의 모두가 가족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빈곤의 공포로부터 해방된다면 인구는 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에 틀림없다. 산업과 행복이 발달/증진된다면 각 세대는 점차로 많은 향락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의 체질상으로 보아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인구 수의 증가가 그들의 생계 수단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 필연적 결과로서 행복과 인구가 계속 감퇴되는 현상, 즉 퇴보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선과 악의 주기적 반복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선악의 주기적 반복현상이 곧 주기적 빈곤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멜서스가 책에서 말했다. 그는 이어서,

“빈곤의 원인은 바로 개개인에게 있다는 것, 그 빈곤의 구제수단은 바로 그들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이 사는 사회도 또한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부도 이에 대해선ㄴ 아무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 사회와 정부는 그들을 구제하고자 아무리 열렬히 어떤 정책을 기획한다 할지라도 자비로운 마음에서 나온, 그러나 불가능한 약속인 그것은 실제로 참되게 수행될 수 없다는 것, 노동임금만으로 일가를 부양할 수 없는 상황은 국가가 그 이상으로 국민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적어도 그 이상의 국민을 부양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징조라는 것, 그런 경우 노동자가 결혼하면 그것은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는커녕 도리어 사회에 무거운 부담을 지우는 동시에 자신을 궁핍 속에 빠지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신의를 배반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신이 자연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성있는 모든 인간에게 되풀이하여 들려주는 훈계를 준수하기만 하면 능히 피할 수 있는 여러 질병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그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 전까지는 그들이 현재와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의 무모함과 태만을 정당하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찾은, 이 책에서 그의 생각을 대표하는 구절이다. 결국 내 인생의 모든 결정은 나로 말미암아 나(나의 가족)에게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쉽게 얻는다면 결정도 그만큼 쉬울 것이고, 반대급부로 쉽게 잃을 수도 있다. 반대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결정을 했다면 그 결정은 매우 신중해야할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은 오래 지속하는 것일 것이다.

글을 줄인다. 멜서스는 <자본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인구론>은 다시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쓸 때 영향을 끼쳤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멜서스의 <인구론>에서 유효 수요 이론을 만들었다. 멜서스는 목사인 동시에 경제학자였다. 애덤스미스의 이론이 멜서스를 거쳐 케인지안 학파로 진화하였나보다. 마치 신의 섭리가 경제에 널리 퍼져있음을 보여주듯, 이 경제의 근간은 개인의 보상을 쫓는 인간의 본능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하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