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만에 사진 앱을 열어 옛날 사진들을 본다. 나름 재밌게 살았구나. 사진들 속에서 나는 많은 곳을 다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 속에는 모험의 순간도 있고 최고의 순간도 있고 최악의 순간도 있다. 젊음을 쥐어짜듯 어린 날을 보냈구나. 지금 보내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 줄도 모르고 그저 하고 싶은 것들과 순간의 즐거움을 찾으며 보냈구나. 영화 제목 그대로 때론 멍하니,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신이 나를 20대 시절로 돌려보내 준다면 나는 돌아갈까? 나는 안 가겠다고 말할 것 같다.

나의 2세가 태어난 올해 나는 만 나이로 33살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35살인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갖는 의미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나이는 개인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에 보탬이 되지 않는 정보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 있는지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쓸데 없는 정보다. 위아래로 애들이 많아 복작거리던 어릴 적엔 중요했을 수 있다. 동갑이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가 어울릴지 말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즉, 나이는 거시적 차원에서 그룹 속 인간을 구분하고 식별하는 용도이지, 한 인간의 특질을 추정하거나 예측하기엔 매우 먼 지표(?)이다.

그래서 경험이 나이보다 더 중요하다. 아니, 그냥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나잇값이란 내 능력에 선을 긋는 제한선이 될 수 있고, 경험이 없는 단조로운 사람에게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가 될 수 있다. 나이는 시간을 가늠하는 시계가 아니다. 기계처럼 자기 나이로 수명이 다하고 있음을 체크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나이에 집착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34살을 향해 가고 있구나 정도? 난 더이상 20대가 아니지, 그때와는 몸과 마음이 많이 달라졌구나, 꽤 멀리 왔구나 하는 정도? 이제 책임질 사람이 한 명 생겼으니 내 인생은 앞으로 크게 달라지겠구나.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고 무엇은 절대 지켜야하겠구나, 를 저울질하는 정도다.

역설적이게도, 새 식구가 태어났지만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초점의 변화를 겪는다. 영화 <겟아웃>이나 <블랙미러> 에피소드처럼, 내 머릿속 어떤 공간에 내가 앉아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머릿고 내가 다시 보고 느끼는 느낌이다. 20대에는 완전한 1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봤다면 지금은 1.5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를 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지금 의식한달까.

정말 간만에 신선한 기운을 받았던 뉴스가 있었다. 락밴드 솔루션스가 재개발 철거를 앞둔 홍제동 인왕아파트에서 했던 공연이다. 아! 이것이다! 날것을 만지면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것에 희열을 느낄 줄 아는 그 말랑말랑함! 낯선 것에 쉽게 감동하고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모습! 소리치는 에너지!

57년의 나이로 수명이 끊어진 이 콘크리트 시체에 젊은이들이 모여 생명의 축제를 열었다. What a circle of life!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옛것이 가되 그 옛것에서 새것이 태어난다. 이날 솔루션스와 팬들은 함께 변화와 희망을 예고했다. 엄청난 사건이다. 젊음의 에너지는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에너지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젊음의 모습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내가 가졌던 한국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타깝지만 한국은 앞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될 것이다. 아기가 없고 젊은이가 활동하지 않는 이 나라는 큰 변화를 겪어야 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변화라는 것은 나이 들듯 필연적이다. 다만 그 변화를 겪어내는 사람들 마음속에 희망이 있다면 좋은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예술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좋은 예술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위대한 예술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어루만진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예술은 어둠과 빛을 모두 표현한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Lion Boy에게, 우리가 어디에 있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세상이 패배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쪽의 의견이라는 것을. 너의 젊은 에너지를 빨아 먹히는 곳에 있지 말고 너의 젊은 에너지를 맘껏 쓰고 나눌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가리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fin.

Leon

부모는 작은 새 생명을 세상에 데리고 온다. 부모는 자녀를 키워 자라날 세상에 대비시킨다. 아이 주변에 어떤 어른들이 곁에 있는지, 또 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컸는지에 따라 세상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 만들어진다. 어떤 아이에게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곳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끊임 없는 영감과 기회가 있는 모험이고, 어떤 아이에게 세상은 잘 못 건드렸다가는 내 손을 콱 물어버릴 무서운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듣고 인생이란 게임에 뛰어든다. 뛰어들어야 세상이 내가 들은 그대로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변한건지, 세상이 달라진건지 모호한 요즘이다. 과거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어릴 때 내 마음을 난도질했던 상처들은 아물었다. 살짝 눌려도 아팠던 곳들은 무뎌진다. 행복과 불행은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환경 속에서 직접 찾아야함을 배운다. 내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스스로 용서할 수는 없지만 남에게 용서를 구할 용기를 갖는다.

상황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힘을 집중해야한다. 숨이 붙어있는 한 외부의 압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할수록 역풍은 세진다. 그러니 마음 속에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방법이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대상이 변한다. 세상은 정반합이고, 균형을 찾으려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운행한다. 세상 속 인간들은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는 세상의 이치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대리인이자, 중개인이자, 행위자이자 매개인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을 인정한다. 단순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것이고, 반대로 복잡할 거라 지레 겁을 먹은 것은 매듭을 풀듯 단순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단순한 것은 단순한 대로 이유가 있고, 복잡한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다.

내 뒤에 있던 문이 이제 곧 영영 닫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살아온 길과 지금 서 있는 지점이 아득히 분리된다. 몸은 이제 앞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볼 이유는 이제 사라졌다. 이 단절의 현상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내가 결정했다.

상처받고 고독하던 어린 시절 밤마다 나를 찾던 고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답을 찾는 질문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때때로 내가 하늘을 바라볼 때 나의 지금 위치를 비추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빠가 되었다. 출산을 하루 앞 둔 만삭의 아내를 봐도 감각이 없었다. 태어나는 날까지 확실한 것이 없었다. 며칠동안 자연 분만을 위해 노력했는데, 산도를 통과하기에 아기가 너무 커서 제왕절개를 해야했다. 우리가 만든 아기인데 이 아기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방법을 정할 수 없더라. 앞으로 아이가 커가면서 우리가 100% 통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임을 자연스레 알게된 순간이었다.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제야 현실로 다가온다. 10개월간의 임신 기간이 있었기에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는 그 첫 순간이 값지다.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최선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지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감은 있다. 지금처럼 하루하루 직접 경험하는 과정 속에 방법이 있을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은 복잡해 보지만 단순할 것이다.

이 작은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상에 나온 LEON에게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가르칠까? 그 전에 우리 둘은 부모로서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우리의 사랑과 결심이 생명의 작은 불꽃을 틔웠고 너의 엄마가 너에게 첫 호흡을 불어넣었다. 이 친구는 우리 둘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겠지.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그 속에서 즐거움과 시간을 벗으로 삼아 아이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알게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2025년 5월 28일 오후 4시 15분. 생일 축하해, 레온.

The lion boy.

죄인들

내 마음이 어떤 대상에 낙인을 찍으면 그 낙인을 지우기가 참 어렵다. 그 낙인을 지우려면 그 낙인을 찍었던 나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 심리학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꺼린다. 그만큼 인간은 확신을 만들어야 움직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을 후회하는 것만큼 뼈아픈 자기혐오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약 3년 전에 나답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나는 스스로 대단해 보이기 위해, 그리고 일확천금의 욕심을 부려 잘못된 투자 결정을 내렸다. 나는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그럴듯한 계획을 믿고 거금을 이체했다. 항상 too good to be true 한 제안이나 정보는 걸러 들을 것. 나에게 그런 일생일대의 기회가 제 발로 굴러올 리가 없다. 그러나 혈기 왕성했던 그때의 나는 마치 내가 바로 골든 보이(golden boy)라 여기며 건드는 것들마다 저절로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고, 무언가 이상한 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외풍이 심하게 부는 집으로 이사 가놓고 괜찮겠지, 하며 두 번의 겨울을 지나고 보니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가 집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것이다. 이 곰팡이는 정의를 피해 음흉하게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곳들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원체 좀 센티멘털한 사람이라, 이따금 과거를 돌아보며 반추하고, 내 삶의 궤도를 재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무언가를 깊게 해야 뭔가를 했다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데, 동시에 깊이에 대한 겁도 있는 사람이다. 몰입을 갈망하면서 불안이 뒤를 잡아끄는 그런 불행한 시소게임을 하고 있다.

이번 개인투자자 조합에서 사모 투자를 경험하며 이 세속적인 세상에 대해 배운다. 남의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 돈만큼 그 돈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존재한다. 남의 돈(Other People’s Money)을 쓰는 것은 마약(OPiuM)에 중독되듯 멈출 수 없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남의 돈으로 만든 토대 위에서 자기들만의 도취한 라이프스타일을 만드는 순간, 투자자 및 경영자 모두에게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절대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심리적으로 ‘내 돈이 아닌 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사필귀정은 맞는 말이지만 명제가 필요하다. 사자성어 자체로는 매우 게으르기 그지없다. 그르칠뻔한 일을 다시금 올바른 상태로 돌리기 위해서 드는 노력을 쏙 뺀 사자성어다. 정의를 구현해야 할 모티브를 찾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정보원을 찾고, 관계자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그들을 고무시키고, 행동을 촉구하도록 단합시키고, 실질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일들이 빠져있다. 이 일들은 매우 고독하다. 오랜 기간동안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이 인간 심리가 신기한 것은, 어떤 임계점이 지나면 신기하게 한두 명씩 따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를 조용히 주시하며 스스로 확신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느낌이다. 그만큼 리더는 외로움을 벗으로 삼고 묵묵히 최전선에서 싸워줘야 한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말에 힘이 생긴다. 집단을 이끌려면 가장 귀찮고 힘든 일들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절대 간과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은, 이유와 목적이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 자체에 있어야 한다. 적당한 희망은 필요하지만, 희망 자체는 엄청나게 높은 레버리지다.

만약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같은 투자 선택을 내렸을까? 답은 . 그 이유는 나는 내가 투자하는 사업체 너머에 있는 그 경영진과 관계자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가 만사다. 세상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럼에도 나는 사업성 자체만 믿었다니. 배가 좋아도 조타실에 있는 사람들이 저질이라면 그 배는 절대 큰 바다로 나갈 수 없다. 근데, 생각보다 그 사람이 저질이냐 아니냐는 조금의 압박만 가해보면 나온다. 그건 참 신기하다. 인간의 본성(true color)은 압박에 약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꾸준한 압박을 견디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무섭다.

어쩌면 그들을 내 마음에 죄인으로 섣불리 낙인을 찍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Don’t hate the player, hate the game’ 이란 말도 있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측은함, 증오심은 이제 없다. 이 상황을 마무리 단계로 추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도 처음에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서 해결을 촉구할 당시에는 복수의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시간을 오래 겪었다. 아, 이러한 불안감이 계속되면 나를 갉아먹겠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원금을 회수할 수 없게 되더라도,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과거 내가 했던 선택에 대한 책임의 연장선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설령 그 돈을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한 명의 투자자로서 나의 투자 경험을 내가 노력한 대로 마무리짓고 싶다는 결론으로 다다르지 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마음이 사라졌다. 결과는 내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무엇이든지 오래 하려면 결과를 바라기보다 오늘 하는 행동에 나의 옳음을 주입하면 된다. 그렇게 간단하다.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내가 만든 명언, ‘추진력은 하겠다는 마음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