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물리학 자습

70일된 내 아들의 눈동자만큼 빛나는 것이 없다. 이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빛을 반사할듯 투명하다. 갓난 아기는 시력이 거의 없다. 얼굴 바로 앞 형체만 조금 알아보고 밝고 어두움 정도만 구분한다. 2개월이 되면 망막에서 색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지만 두세살은 되어야 어른이 보는것 같이 세상을 보게 된다. 어린이들이 보는 세상은 얼마나 고해상도일까?

<세상은 먹색>

동양의 현자들은 참 현명했다. 흑백 사상을 통해 세상만사를 설명하는 관점을 만들었다. 동양의 화가들은 먹 하나로 수백개의 음영을 표현하며 사물, 원근, 감정선을 그렸다. 한 폭의 풍경화에 너비와 깊이가 있다. 내 아들은 크면서 컬러풀한 세상을 즐길 것이다. 반면에 나는 먹색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컬러라고 생각할 것이다. 탁하다는 말이 아니다, 층층으로 겹겹이라는 말이다. 세상이 반사하는 음양의 깊이에서 내 눈은 반짝이고 입은 무거워진다.

<It’s very personal>

속담에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 상충하는 두 속담이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는척하지 말고, 속단하지 말고, 계속해서 진실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사적으로.

‘추구(追求)’ 의 뜻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좇아 구한다’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 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깐은 멈춰 쉴 수 있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중도에 그만두었는가. 러닝앱에서 Start 버튼을 눌렀다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Stop을 누를 수 없는 것처럼,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순 있어도 중간에서 영영 멈출 수 없다. 일단 출발했으면 결국 도착선을 넘어야한다. 안톤 체호프의 권총이다.

<Chain reaction>

하루의 8할은 연쇄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져있다. 잠에서 깨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나가는 것처럼, A사건 다음에는 반드시 A-1, 아니면 B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며 바로 직전의 액션에 종속된다. 하루를 자주적이고 독자적으로 보낸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어떤 ‘근본 행동’에 의한 연쇄 반응들로 하루가 간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만큼 최초의 사건 혹은 액션이 중요한데, 그 행위에 반응하는 연쇄 활동들은 과장을 좀 더 보태면 B->C->D… 반자동으로 일어난다. 모든 연쇄 반응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루를 통채로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특정 연쇄 반응들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통제 밖의 사건들에 반응하다가 끝이 나는게 하루다.

<에너지, 기>

그래서 변화를 만드는 일은 어렵다. 변화하려면 반복이 필요한데, 반복은 비슷한 연쇄 반응들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누적시키는 것은 집중을 요하며, 집중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는 자력 에너지어야 한다. 세상과 내 몸 모두 에너지로 구성되어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고, 운(luck)은 사실 세상이 가진 에너지고, 기(energy)는 내가 가진 에너지다. 내가 가진 에너지로 세상 속 에너지들을 관통하기도, 피해가기도 하며 살아간다. 에너지들이 기가 막히게 조화되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가변적이고 휘발될 지식 조각들대신 나만의 에네르기를 키우고 훈련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기운을 기운차게 뻗어내는 것이 기세다. 하기로 한 것을 해내는 힘,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키는 힘.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함>

지난 몇달간 내 정신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힘들게 했던 고민이 있었다. 때론 스스로 내린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 불행해진다. 왜 나는 이렇게 힘은 힘대로 들면서 불안하고 슬플까 생각해보니, 항상 바깥에서 최적의 조건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길이 열리길 초조하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순간은 있을 수 있어도 절대 오래갈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있었던 방법은 의외로 쉬웠는데, 그냥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헛된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힘이 드는 이유는 내가 순응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나의 조건과 환경에 대한 내면의 불평이 들리지 않도록 철저히 불만의 싹을 밟자.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나약한 소리기 때문이다. 어차피 쉬운것은 없지 않은가. 하루가 쉬워선 안된다. 하루가 쉬이 흘러가게 놔두어선 안된다. 하루를 지나치듯 보내서도 안된다. 익숙한 것들이 만만해지도록 두지말자.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저무는 저 해를 보고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하자. 내가 선택한 고통이자 축복이다. 불평하지 않는다.

fin.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만에 사진 앱을 열어 옛날 사진들을 본다. 나름 재밌게 살았구나. 사진들 속에서 나는 많은 곳을 다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진 속에는 모험의 순간도 있고 최고의 순간도 있고 최악의 순간도 있다. 젊음을 쥐어짜듯 어린 날을 보냈구나. 지금 보내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 줄도 모르고 그저 하고 싶은 것들과 순간의 즐거움을 찾으며 보냈구나. 영화 제목 그대로 때론 멍하니,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신이 나를 20대 시절로 돌려보내 준다면 나는 돌아갈까? 나는 안 가겠다고 말할 것 같다.

나의 2세가 태어난 올해 나는 만 나이로 33살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35살인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갖는 의미는 계속 줄어들 것이다. 나이는 개인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에 보탬이 되지 않는 정보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 있는지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쓸데 없는 정보다. 위아래로 애들이 많아 복작거리던 어릴 적엔 중요했을 수 있다. 동갑이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가 어울릴지 말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즉, 나이는 거시적 차원에서 그룹 속 인간을 구분하고 식별하는 용도이지, 한 인간의 특질을 추정하거나 예측하기엔 매우 먼 지표(?)이다.

그래서 경험이 나이보다 더 중요하다. 아니, 그냥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나잇값이란 내 능력에 선을 긋는 제한선이 될 수 있고, 경험이 없는 단조로운 사람에게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가 될 수 있다. 나이는 시간을 가늠하는 시계가 아니다. 기계처럼 자기 나이로 수명이 다하고 있음을 체크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나이에 집착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34살을 향해 가고 있구나 정도? 난 더이상 20대가 아니지, 그때와는 몸과 마음이 많이 달라졌구나, 꽤 멀리 왔구나 하는 정도? 이제 책임질 사람이 한 명 생겼으니 내 인생은 앞으로 크게 달라지겠구나.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고 무엇은 절대 지켜야하겠구나, 를 저울질하는 정도다.

역설적이게도, 새 식구가 태어났지만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초점의 변화를 겪는다. 영화 <겟아웃>이나 <블랙미러> 에피소드처럼, 내 머릿속 어떤 공간에 내가 앉아 있고,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머릿고 내가 다시 보고 느끼는 느낌이다. 20대에는 완전한 1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봤다면 지금은 1.5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를 땐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지금 의식한달까.

정말 간만에 신선한 기운을 받았던 뉴스가 있었다. 락밴드 솔루션스가 재개발 철거를 앞둔 홍제동 인왕아파트에서 했던 공연이다. 아! 이것이다! 날것을 만지면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것에 희열을 느낄 줄 아는 그 말랑말랑함! 낯선 것에 쉽게 감동하고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모습! 소리치는 에너지!

57년의 나이로 수명이 끊어진 이 콘크리트 시체에 젊은이들이 모여 생명의 축제를 열었다. What a circle of life!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옛것이 가되 그 옛것에서 새것이 태어난다. 이날 솔루션스와 팬들은 함께 변화와 희망을 예고했다. 엄청난 사건이다. 젊음의 에너지는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에너지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젊음의 모습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내가 가졌던 한국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타깝지만 한국은 앞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될 것이다. 아기가 없고 젊은이가 활동하지 않는 이 나라는 큰 변화를 겪어야 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변화라는 것은 나이 들듯 필연적이다. 다만 그 변화를 겪어내는 사람들 마음속에 희망이 있다면 좋은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예술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낀다. 좋은 예술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위대한 예술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어루만진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예술은 어둠과 빛을 모두 표현한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Lion Boy에게, 우리가 어디에 있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세상이 패배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쪽의 의견이라는 것을. 너의 젊은 에너지를 빨아 먹히는 곳에 있지 말고 너의 젊은 에너지를 맘껏 쓰고 나눌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가리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fin.

Leon

부모는 작은 새 생명을 세상에 데리고 온다. 부모는 자녀를 키워 자라날 세상에 대비시킨다. 아이 주변에 어떤 어른들이 곁에 있는지, 또 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컸는지에 따라 세상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 만들어진다. 어떤 아이에게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곳이고, 어떤 아이에게는 끊임 없는 영감과 기회가 있는 모험이고, 어떤 아이에게 세상은 잘 못 건드렸다가는 내 손을 콱 물어버릴 무서운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듣고 인생이란 게임에 뛰어든다. 뛰어들어야 세상이 내가 들은 그대로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보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변한건지, 세상이 달라진건지 모호한 요즘이다. 과거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어릴 때 내 마음을 난도질했던 상처들은 아물었다. 살짝 눌려도 아팠던 곳들은 무뎌진다. 행복과 불행은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환경 속에서 직접 찾아야함을 배운다. 내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스스로 용서할 수는 없지만 남에게 용서를 구할 용기를 갖는다.

상황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힘을 집중해야한다. 숨이 붙어있는 한 외부의 압박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할수록 역풍은 세진다. 그러니 마음 속에 항상 평온함을 유지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방법이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대상이 변한다. 세상은 정반합이고, 균형을 찾으려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운행한다. 세상 속 인간들은 자연의 한 부분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는 세상의 이치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대리인이자, 중개인이자, 행위자이자 매개인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을 인정한다. 단순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것이고, 반대로 복잡할 거라 지레 겁을 먹은 것은 매듭을 풀듯 단순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단순한 것은 단순한 대로 이유가 있고, 복잡한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것은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다.

내 뒤에 있던 문이 이제 곧 영영 닫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살아온 길과 지금 서 있는 지점이 아득히 분리된다. 몸은 이제 앞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볼 이유는 이제 사라졌다. 이 단절의 현상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내가 결정했다.

상처받고 고독하던 어린 시절 밤마다 나를 찾던 고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답을 찾는 질문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때때로 내가 하늘을 바라볼 때 나의 지금 위치를 비추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빠가 되었다. 출산을 하루 앞 둔 만삭의 아내를 봐도 감각이 없었다. 태어나는 날까지 확실한 것이 없었다. 며칠동안 자연 분만을 위해 노력했는데, 산도를 통과하기에 아기가 너무 커서 제왕절개를 해야했다. 우리가 만든 아기인데 이 아기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방법을 정할 수 없더라. 앞으로 아이가 커가면서 우리가 100% 통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임을 자연스레 알게된 순간이었다.

태어난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제야 현실로 다가온다. 10개월간의 임신 기간이 있었기에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보는 그 첫 순간이 값지다.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최선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은 부모가 될지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감은 있다. 지금처럼 하루하루 직접 경험하는 과정 속에 방법이 있을 것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은 복잡해 보지만 단순할 것이다.

이 작은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상에 나온 LEON에게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가르칠까? 그 전에 우리 둘은 부모로서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우리의 사랑과 결심이 생명의 작은 불꽃을 틔웠고 너의 엄마가 너에게 첫 호흡을 불어넣었다. 이 친구는 우리 둘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겠지.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그 속에서 즐거움과 시간을 벗으로 삼아 아이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을 알게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2025년 5월 28일 오후 4시 15분. 생일 축하해, 레온.

The lion 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