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객과 영업

어느 순간부터 호객과 영업이 비슷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객은 말 그대로 고객을 부르는 행위이다. 호객의 ‘호’에는 부른다는 뜻도 있는데 소리를 지른다는(소리 지를 효) 뜻도 있다. 뜻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좋은 단어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호객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러 형태의 호객 행위를 경험했었는데, 을왕리나 속초 등의 바닷가가 대표적인 장소다. 먹자거리를 걷다 보면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잘해드릴게’라고 소리 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떤 곳에서는 차의 앞을 막아서면서 주차하도록 강제한 곳도 있었다.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곳에 남산돈까스를 파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는데, 여기도 각 가게를 대표하는 호객 전사들이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마치 사냥감을 찾듯 노려보며 차도로 갑자기 뛰어드는 용감한 호객행위를 보여주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우리는 호객을 당할 때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의 고민 과정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저녁 시간에 우리 일행이 먹자골목을 걷고 있었고 배가 고팠다면 그 골목에 있는 음식점중 한 곳을 정해서 들어갔을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음식점 안을 보며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 요소인데, 호객 행위는 이런 소소한 재미를 원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행위이다. 나는 호객 행위 자체를 어느 정도 재미로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나에게 소리치는 것까지는 웃고 넘어가지만 내 앞길을 막거나 팔을 잡아끌거나 하는 순간 재미는 끝난다.

반면에 영업이라는 말은 훨씬 더 높은 위계에 있는 단어다. 영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업이란 것은 내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행위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영어로 영업을 세일즈라고 하는 것도 영리를 추구해야 하는 회사에 재산적 이익을 가지고 올 새로운 고객을 (판매를 통해)모시고 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제품을 제작할 것이 있어서 업체를 찾고 있었다. 여러 군데를 리스트업하면서 어디가 내 요구사항을 가장 잘 반영해 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쓰레드에서 한 업체를 찾았는데, 포스팅도 자주 올리고 제품 샘플 사진들과 함께 자기는 이런 것들을 다 직접 디자인했다는 둥 굉장한 자신감을 보여줬다. 언제든 DM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아, 이 적극성을 보아하니 굉장히 성실한 프로겠구나 싶어 연락했다. 그렇게 처음 사무실로 찾아가 대면으로 만났을 때 이분은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쓰레드에서 쓴 것만큼 고객의 아이디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여기가 실력은 있겠다고 생각한 게, 자기 부모님의 제조업체를 기반으로 한 기획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자기 직감을 믿어야 한다. 실력은 있겠다는 생각 하나로 제작을 주문했는데 그것은 내 실수였다. 이 사람은 미팅 시간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견적 내용도 제작 단계에서 누락되었다. 총체적으로 난국이었다. 내가 느낀 것은, 돈 벌 능력이 없는 사람도 호객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호객에도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그 실력의 80%는 실체가 없는 거짓말일 것이다. 호객은 일방적으로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경우가 많다. 호객 행위는 마치 악성 재고를 털어내려고 하거나, 내 가게에는 안 와도 적어도 옆집 경쟁사로 고객이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느낌이다. 호객 행위는 업장이나 고객에게 모두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한다.

시장은 원래 시끌벅적한 곳이지만 점점 시끄러운 곳이 되어감은 틀림없다. 어디를 가든 자기들이 파는 제품들을 우리 얼굴에 들이밀기 위해 혈안이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호객이고 무엇이 마케팅인지 모르겠다. 현대 마케팅이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점에서는 단체 호객 행위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근데 또 ‘호의적인 호객행위’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케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장기전에도 자신이 있다면 호객행위보다 더 나은 방식을 찾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 명의 고객을 당장의 매출 돌려막기로 보는 순간 호객행위가 되는 것이고, 다음에도 찾아줄 고객이 되거나 다른 사람을 데려오는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영업이라고 생각한다.

fin.

many gods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늘고 있다. 이미 2020년부터 미국 개신교 신자 수가 인구 절반 이하로 줄었고, 작년에 퓨리서치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거의 80%의 성인 미국인들이 본인 삶 속에서 종교의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응답했다. 젊은 세대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뚜렷하다. 신앙을 갖는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된 것이다.

종교가 설 자리가 줄어든 배경은 다양한데, 선진국들에서 먼저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살만하니까 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미국만큼이나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도 비슷한 데이터 결과가 나왔고, 일본에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자기는 종교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조직화하고 세력화된 종교를 떠나고 있다. 사회 세속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종교가 과거의 유물로 취급되고 있다.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대부분의 유년기부터 청소년 시절을 교회에서 보냈다. 나에게 교회는 형, 누나, 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 집단이었고, 배움의 공간이었고, 규율의 공간이었다. 매주 예배가 끝나면 교회 옆 학교 운동장에서 형 동생들과 늦게까지 축구했다. 어른들끼리 축구를 하면 패스는 거의 받지 못해도 끼워주었다. 난 교회에서 기타를 처음 배웠고 성탄절 같은 교회 행사에서 뮤지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교회에 탁구대가 있어서 예배 중간중간 사람들이랑 탁구를 치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다. 내가 스무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내 인격 형성 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교회라는 작은 조직된 사회였다.

내 머리가 좀 커지다 보니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것을 넘어 교회에 봉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때론 답답해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 바라본 목사님과 지금 바라보는 목사님의 인식도 달라졌다. 이렇게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영향을 준 교회라는 곳을 다시 처음부터 정립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관점에서 기독 교리를 이해해 보기도 하고, 사회적 관점에서 교회라는 조직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신앙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인류의 탈종교 현상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크게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선 사회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부유해지면서 종교 의존도가 낮아졌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두 이념은 시간의 가치를 가장 높은 곳에 두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된 재화로써 투자의 가치를 갖게 되면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종교에 그다지 가시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할 시간에 차라리 일을 더 하는 게 더 나은 내일을 보장한다는 것을 믿게 만든 능력주의의 사회(meritocracy) 속에 살기 때문이다.

나의 미국 교환학생 호스트 가족들도 모두 교회를 다녔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마다 집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했는데, 우리 가족끼리(난 당시 호스트 부모님을 아빠 엄마라 부를 정도로 가족원의 대우를 받았다)만 하지 않았고 꼭 교회 친구들을 초대하여 함께 성경 구절을 정해 낭독하며 토론했다. 그게 거의 20년 전이다. 지금이었다면 아마 그 시간에 전공책을 한 번 더 읽거나 유튜브로 강의를 듣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도 나아지고 있고 인터넷을 통한 지식 습득이 보편화되면서 정보를 얻는 비용이 거의 0에 수렴한다. 지금의 배움에는 엄격한 권위도 사라져, 아는 것이 선(good)인 시대를 이루었다. 학문이 발전했다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문하고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인류는 발전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궁극적인 상태는 언제나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종교가 정보와 학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에게 성경책은 필요 없는 책이 되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들 덕분에 더 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고, 다양한 역사서를 읽어서 광범위한 역사적 지식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종교적 지도자들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수능 강사들이 연예인을 넘어 광신도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는 수험생들이 힘든 입시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절대적인 정보 전달자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종교는 핵심 사업들을 다 빼앗긴 사양 사업이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지구 최강자가 되었다. 상상력이 과학과 종교,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발전의 꽃을 거듭 피워왔다. 앞으로 인류가 모를 것은 딱 하나, 상상의 끝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도 DNA에 남겨진 진화의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인류는 약할 때 무언가를 의지해오며 생존해 왔다. 내 옆 동료에게 나의 안전을 의지하던 것이 군주, 교황, 정치 등으로 구조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그래서 유한한 목숨을 가진 인간은 결국 약해질 것이고, 그때 의지할 곳을 분명 찾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수십 개의 신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종교는 갈 곳을 잃었고 새롭게 만들어진 신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신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었는지, 혹은 그 존재를 이제 찾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 있었기에 초지능(hyperintelligence)가 있는 것인지, 초지능이 있었고 그다음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초지능을 우리는 종교화할 것이다. 알고리즘이 교리처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행동을 바꿀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운명이 바뀌듯, 우리는 알고리즘을 통한 운명론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로 오랫동안 논쟁할 것이다.

수천 년 전의 종교가 신격화했던 인물들은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나를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신들은 나를 정말 잘 아는 나머지 나에게 맞춤형 교리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2진법 알고리즘을 믿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하게 새로운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바티칸이 건축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데이터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면서 데이터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다. LLM 기반의 추론 모델들에게 구독료라는 십일조를 바쳐가며 의지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할루시네이션과같이 부정확한 정보들이 많지만, 앞으로는 그들이 내놓은 답변들을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믿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모태 LLM들은 종교가 하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파생되어 나오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알고리즘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글로벌 시대라는 말도 구닥다리 단어가 되었다. 이미 우리 인류는 초연결된 사회다. 이미 OpenAI의 LLM, 앤트로픽의 클로드, 메타의 라마 아래 하나가 되었다.

인공지능은 우리 개개인에게 엄청난 힘을 줄 것임이 틀림없다. 인간은 이 새로운 신(인공지능)을 통해 자신만의 구원 방식을 찾을 것이다, 혹은 만들어낼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