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살다보면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나이가 많다고 꼭 그 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틀리다. 마찬가지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대함을 제공해야할 이유도 없다. 제도적 장치가 아닌 것에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기대다.

진화론자 리처드 히긴스는, 다음 세대를 희생하고 자신만을 돌본다면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했다. 장수가 더이상 ‘사회적’ 미덕이 아니게 된 지금, 손윗 사람이 나의 예우를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검증이 더 날카로워졌다. 존경심은 나이가 아니라 그 인격과 자취를 향해야 하는 것인데, 이 인격과 발자취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자리다.

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는 편이다.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했든간에 그 자리는 앉은 사람에게 시험의 자리이기도하다. 누구에게 자리는 나의 연약한 자존심을 채워주기도 하고 든든한 돈 나올 구멍이 되기도 있다. 남들이 나보고 제발 앉아달라고 열성으로 요구하는 자리도 있는 반면 평생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미안하지만 많은 어른들이 이런 자리에 앉아있다.

인성과 능력이 어떻든간에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과분한 자리라 생각할수록 엉덩이 딱 붙이려고 애쓴다. 자기 그릇보다 큰 자리에 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 이끌어야 할 때 숨는 것이다. 용기를 내야 할 때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잇값을 못하는 것이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비범한 인물들과 자리 욕심만 가진 비겁한 범인들이 섞인게 이 세상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Hope is colorful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이 훨씬 인기있는 주장이다. 좋은 소식보다 불행한 소식이 뉴스거리가 된다. 불행한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 후에 분노케하고, 그리고 보통 체념케한다. 우리들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힘빠지는 소식들을 접한다. 어쩌면 나혼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과몰입한다고 생각한적도 있지만 아무래도 남일이 그냥 남일같지 않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고 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대를 다녀왔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불행한 소식을 접하면 응당 공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감정 아닌가? 민심을 챙긴다는둥 핵심을 빙 둘러가는 어젠다 말고, 왜 우리가 이렇게 불행한 소식들을 접하고 있는지를 멈춰서 이야기해보려는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답을 찾을것이다. 다시 희망을 품게될 것이다. 국가적 위기 속에도 새벽마다 신문은 배달될 것이고 가게들은 지금처럼 계속 손님을 받기 위해 문을 열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반갑게 웃고 떠들것이다. 각자의 지금을 살다보면 무겁게 누르는 이 기운도 조금씩 엹어질것이다. 그러니 나도 낙천적인 기세를 잃지 않겠다.

낙관적인 사람은 때로 바보로 취급된다.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 12월 내내 시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놀라운 변화가 보였다. 예전의 촛불집회에 비해 훨씬 칼라풀해졌다는 것이다. 아이돌 응원봉을 가지고 거리로 나온 젊은 남녀들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했다. 염세적인 비평가들보다 훨씬 현실적인 일을 했다. 정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서서히 사라질지라도 행동을 촉발한 그들의 책임 의식은 기억에 남을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행동이다. 정치색을 떠나 그들은 나름의 가치 판단을 했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집회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이 장면을 보고나니 모든 불행을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순진하다고 해도 좋다. 순진한 것은 귀한 것이다.

보고싶은 것은 더 보고, 듣고 싶은 것은 더 듣고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워져도 내 귀에 들리는 내용은 선명해지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분명해진다. 인간의 한계이자 능력이다. 인간이 뇌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들만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한 것이다. 휴리스틱이라고도 하고 확증편향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진화한 덕분에 인간은 신념을 유지할 수 있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절대적인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지금 내가 믿는 것이 사회 다수의 믿음인지, 혹은 강력한 권력자가 어떤 믿음 체계를 가졌는지에 따라 역사가 기록되어왔다.

이 경향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이든 쉽게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숏폼 컨텐츠들은 휴리스틱이 최소 몇 배는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부추겼다. 이것이 우려되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할지 판단하기 전에 알게모르게 무엇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21세기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레지스탕스가 되어 선과 악을 모르는 빅브라더 기술 앞에서 저항해야한다.

오늘날의 하이테크(high tech)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하이테크는 중학교때 처음 써 본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이었다. 이 볼펜의 그립감부터 부드러운 볼의 무브먼트를 경험했을 때, ‘아, 수준 높은 기술(필기력)이다’ 라고 느꼈다. 하이테크는 보통 시중에 있는 대다수보다 수준이 높은 기술을 의미한다. 하이테크에 걸맞은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쳐야한다. 내 기억에 파이롯트 하이테크 볼펜은 쓸 때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펜의 등장으로 학생들은 공부량이 늘었고, 팬시 문화가 커졌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발명품은 모두 하이테크일까? 그 발명품이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했다면 그렇다. 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비슷한 제품들을 선도한다는 것이니까. ‘최초’라는 타이틀은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럼 ‘새로운 것’은 하이테크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새롭다는 것은 변경과 개선도 포함되는데 그것은 하이테크라 할 수 없다. one of many다. 요즘의 광고를 보면 뭐든지 하이테크다. 청소기에도 하이테크, 세탁기에도 하이테크, 의류도 하이테크다. 연구해서 개발했다고 다 하이테크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게 된 텅빈 단어가 된 것 같다.

기술이 인류 사회를 이끌고 있다. 하이테크는 ‘인류의 진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기술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번번이 자연의 힘 앞에 무너지고,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자연(mother nature) 대하듯 겸손해진다. 기술 체계는 이미 그 자체로 믿음(Belief system)이자 신념(Idea)이 되었다. 일론 머스크는 일개 경영인을 넘어 종교적인 인물로 격상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할 것처럼 기술의 선구자들을 신봉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믿는 것은 진정의 믿음이 아니라‘고 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전에 믿음부터 보이는 것이다.

하이테크를 대표하는 AI 과학 기술은 분명 종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비슷해 보이는 신앙심이지만 전자는 철저히 이성과 세속적인 합리성에 입각하고, 후자는 이성보다는 순수 믿음과 교리에 의존한다. 우리 인간의 삶을 더 편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종교와 과학은 각자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만약 기술도 결국 인간의 결핍과 휴리스틱 투성이라면? 하이테크를 만드는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기술이 주는 의미가 또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개인단위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항상 긴장을 놓고 의심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을 조금 나눠보는 것이다.

Good Bye 2024,

fin.

충암고, 동덕여대, 한국

지금까지 나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 가고자 하는 마음에, 혹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썼다. 이번 글은 아마 내가 나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첫 글이 될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 사태는 그간 내가 알던 것들이 틀릴 수 있고, 가졌던 가치 판단 기준을 원점으로 돌려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가 신봉하는 가치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대중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디어나 메이저 언론사의 말을 무조건 맞다고 수용하지 않고, 나름의 정의로운 경험들을 바탕으로 판단의 원칙을 세워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무엇이 애국이며,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일까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또 정의로움이란 어떤 무게감을 가진 단어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낸다는 것이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대한민국에 보수 사상을 가진 당파가 이끄는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은 그 당파의 한판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법기구, 정당의 국회 의석수 등에는 무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왜 대통령과 여당이 추진력을 못 얻고 의견 대립만 난무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나라는 아직도 붕당 정치라는 시대 말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구시대적 당파 싸움들이 이어지는 작금의 상황은 한 명이 죽어야 다른 한 명이 사는 치킨 게임처럼 보인다. 순수한 사상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서로가 각자가 가진 정의의 도끼로 찍어 죽이려는 모습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치졸한 다툼이 지속될수록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치의 본질을 잊게 된다.

이번 여당의 행보를 보면서 보수주의란 여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깨졌다. 야당의 그간 행보도 야당은 진보주의를 바탕으로 한 집단이 아니었다. 만약 진정으로 보수와 진보가 그 어휘의 뜻을 확실히 세울 수 있다면, 이 사회가 발전하고 영속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의 접근법이 모두 필요하다. 국가가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아야 할 가치는 지켜야 하고, 동시에 국가의 독자적인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진취적인 모험을 장려해야 한다.

국가도 생명력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자연스레 쇠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하나의 이념이 지배해야 할 이유는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와 진보는 모두 한 국가를 부흥하게 할 국가적 결정의 이념 프레임워크일 뿐,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차선과 차악이 있을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대화와 교류라는 절차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소폭 진전하는 것이다.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대비되며 존재하기에, 지금과 같이 서로를 죽이려는 모습들은 사실상 그 이념과 사상의 이유를 잃어버린 무책임한 당파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군 통수권자가 절차와 정의를 무시한 채 계엄을 선포한 이번 원인이 오래전에 상실된 통섭에 있다고 본다. 초 정치적, 범 사상적인 교류와 열띤 토론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진 신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모두가 자문해 볼 때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머릿속 생각이 아닌 내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정의하는 신념과 정의로움 또한 나의 말과 행동에서 발현한다. 국가를 지키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국가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나의 합법적인 신분을 보면 된다. 군인이라면 군인의 복무 신조가 내 신념과 정의의 기초가 될 것이다. 공직자라면 공무원의 의무, 신조, 헌장이 정의로운 행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자연인들은 자신이 소속한 곳의 규칙이 정의로움의 기본 틀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하지 않은 곳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실제로 옳지 않다면 그 또한 절차 속에서 교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같은 팀끼리 포용하는 용기이다. 같은 팀이면 골을 많이 넣어 이기는게 중요하지, 내가 혼자 공을 오래 갖고 있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쿠데타나 독재 정치에 비해 민주주의가 사회 개혁이 느린 이유가 절차를 중시하는 거버넌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합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비용을 최소화하여 더 나은 곳에 자원이 배분되게 할 수 있다. 다만 사회적인 비용이 발생하는 시점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몇 년, 혹은 몇십년 뒤에 부담해야 할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라는 결과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정의롭지 못했던 것이 지금 와서 정의로운 경우는 많이 없다. 그만큼 정의란 것은 어쩌면 세월을 초월하는 인본주의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일이 그렇다. 외신은 윤 대통령의 독단적인 계엄 선포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할부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우린 그 비용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을 포함한 충암고등학교 출신의 몇 지도자들은 잘못된 정의 의식을 공유했다. 본분을 잊고 절차를 무시했다. 동덕여대의 몇 학생들은 왜곡된 신념을 공유했다. 학생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성과 책임의식 없이 인과 관계를 무시했다. 이 두 집단은 공통적으로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무력을 동반했다. 절대다수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절차를 독단적으로 없앴다. 이게 우리나라의 지금 모습이다. 연약한 정신에서 나오는 비겁한 하책들이다.

이 글을 통해 반성한다. 알고리즘의 홍수 속에서 나는 과연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수호하고 있는가? 동시에 진취적인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가? 필요할 때 진실을 말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있는가? 내 가족을 위해 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나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가?

fin.

12월 1일 12:59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고 자려고 한다.

1. My Way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다운 모습은 나의 눈에 쉽게 띄게 되므로 그때 느낀 기분을 흘려보내지말고 내 행동과 마음 상태를 포착해 두어야 한다. 나다운 행동이 발현된 순간은 나만의 길을 찾는데에 중요한 단서이자 나의 무의식이 보내는 좌표 신호다.

나다움은 혼동될 수 없다. 그만큼 강한 신호다. 나다울때 느끼는 감정이란, 마치 내가 나로부터 단단히 지탱받고 있어서, 살아볼만한 용기와 함께 내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감정이다. 즉 나답게 산다는 것은 지속해서 하고자 하는 일에 고독이 따름을 이해하고 내 친구가 되어 주는 길이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보람을 느낀다. 보람을 느끼는 삶이 나답게 사는 삶이라 생각한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와 같아서, 나를 이끄는 내면의 중력을 찾지 못 하면 심연으로 흘러가버리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2. Internalizing

중력은 내 안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이끄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한다. 이끄는 힘을 만드려면 나에게 일어나는 세상의 일들을 내재화시켜야 한다. 내재화란 반성과 비판적 사고를 포함하는 자기 응원이다. 이것을 반복해서 훈련하면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다. 내재화를 잘 해낼수록 나를 객관화시킬 수 있고, 그럼 내가 오늘 하루 잘 한 일을 혼자 조용히 축하할 수 있다.

내재화는 하루에도 계속되는 의식적인 노력이다. 자기 검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능동적으로 훈련시키고 학습시키는 행동이다. 남의 말과 행동 반응하는 나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다음에 더 나다운 반응을 준비할 수 있다. 또, 오늘의 목표를 위해 일했던 시간중 얼마나 의식해서 보냈느냐를 반성해보고 다음날에 더 나은 태도로 일에 임할 수 있다.

3. Law of Attraction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리가 쉽게 믿기 어려운 것들 중 하나다. 이 법칙을 이해하기위해 끌어당기는 것 자체를 생각해본다.

마술사 유리 겔라는 눈으로 쳐다보면 쇠 숟가락이 휘는 마술을 선보이며, 자기는 염력을 할 수 있다고 했다(나중에 그것은 쇼였다고 본인이 말했다). 염력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물체에 관여할 힘을 말한다. 쳐다보기만 해도 그릇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염력이다. 실제로 염력이 있다면 그것은 물리의 법칙을 거스르는 초월적인 힘이 된다.

우리는 모두 실제로 염력이 발동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의 초월적 능력은 믿는다. 그 대신 내가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앞에 놓인 물체대신 추상적인 관념으로 대상이 바뀐 것 뿐이다. 이점에는 나도 동의하는 게, 아무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돌이켜보면 실제로 그것이 끌어당겨진 것 같다고 주장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물의 꼭대기에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양한 종교를 만들고, 또 강력한 비젼을 가진 리더를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을 조용히 내 앞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그 믿음을 더 생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재화이고 다른 하나는 선언이다. 난 지난주에 위워크 행사에서 사람들 앞에 나가 내 계획에 대해 발언했다. 보여줄 수 있는 제품은 없었지만 앞에 나가 말해야 했다. 그 결정은 나에게 중요했다, 믿음을 놓지 않기 위해서. 때때로 세상에 알려야 했다. 그때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모두 친절하게 내 목소리에 집중해주었다.

사람들의 응원과 관심은 끌어당김의 법칙은 사실이라는 힌트가 아닐까.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나는 예민하고 쑥스러움이 많아서, 최대한 완벽해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근데 그날 나는 무언가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나는 분명 무언가 끌어당기고 있다.

fin.